내가 어린 시절 대부분을 보낸 과수원은 충주시의 변두리, 멀리 탄금대와 달천강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높은 언덕 위였다. 뒤로는 높고 가파른 계명산이 우뚝 서 있었고 계명산 산자락으로 사과 과수원들과 공동묘지가 연수동에서 안림동까지 연이어 있었다.
과수원에서 시내로 가기 위해서는 여수월과 신촌이라는 동네를 지나야 한다. 나는 아직까지도 50년 전의 여수월과 신촌의 당시 모습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집에서 나서면 우선 사과 과수원들의 아카시아 울타리 사이로 난 좁은 길을 따라 한참을 내려와서야 첫 번째 동네인 여수월이 나타난다. 여기서 선택을 해야 한다. 여수월로 내려가면 열 마지기 논을 거쳐서 내가 다니던 국민학교로 가는 방향이고 그대로 직진을 하면 신촌을 지나게 된다. 내리막이 시작되는 왼쪽으로는 누나 친구인 순이 누나네 작은 집을 시작으로 제법 경사가 심한 길을 따라 작은 집들이 따개비처럼 다닥다닥 붙어있다. 그 집들에는 비슷하게 가난한 이웃들이 비슷하게 어울려 살고 있었다. 언덕 오른쪽으로는 두 개의 공동우물이 있었고 그 우물가에는 항상 여자들이 모여 물을 긷거나 뭔가를 씻곤 했다. 얼굴이 검다고 해서 별명이 붙여진 꺼먹 안서방은 포대기에 아이를 업고 우물가를 어정거렸고 진한 평안도 사투리의 북선 조서방은 하루에도 수 십 차례 무거운 거름을 과수원까지 나르곤 했다. 언덕 끄트머리에는 막걸리를 파는 구멍가게가 있었는데 아버지는 그 집을 겡까도리네라고 불렀다. 겡까도리는 싸움질이라는 뜻의 경상도 사투리였는데 주인 여자가 술에 취해서 툭하면 싸움을 걸어서 경상도가 고향인 아버지가 그리 불렀을 것이다. 나는 이삼일에 한 번은 꼭 그 구멍가게에 들러야 했는데 하루에 두 갑씩 피우시는 아버지의 담배심부름 때문이었다.
겡까도리네 구멍가게를 지나면 오른쪽으로 충주여상이 나타나고 다리를 건너 논둑길을 지나면 다시 변두리 느낌의 동네가 시작되는데 이곳이 고구문거리다. 이 고구문 거리를 지나야 약방과 이발소와 대장간을 지나 경찰서와 학교가 있는 진짜 충주시내가 시작된다. 내게 고구문거리는 시내에 가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지나야 하는 별 특색 없고 가난한 변두리 동네였다는 말이다.
그런데 중학교 2학년 때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 내게 벌어졌다. 이 고구문거리에서 전세 20만 원짜리 셋방살이를 시작한 것이다. 과수원을 약간의 시차를 두고 두 사람에게 나누어 팔고 대신 땅값이 싼 경기도 연천군 전방지역에 밭과 논을 사서 이사를 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사이 식구도 좀 바뀌었다. 할아버지는 내가 국민학교 4학년 때 당시 81세라는 장수 기록을 남기고 돌아가셨고 함께 살던 사촌 누나는 언니를 따라 서울로 올라가게 되어 두 명이 줄었는데 몇 년 후에 큰 형님이 결혼을 하면서 큰 형수님이 들어오고 조카가 태어나서 다시 8 식구가 되었다. 그 8 식구 중에서 아버지와 큰 형님 부부, 고등학교를 졸업한 누나, 어린 조카는 경기도로 이사 가고 엄마와 작은 형, 그리고 나는 충주에 남아서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과수원을 떠나는 것만도 받아들이기 힘든 일인데 가족이 반으로 나뉘게 된 것이다. 내 인생 대부분의 기억을 간직한 곳, 할아버지부터 막내인 나까지 모두 8 식구가 살을 부대끼며 살아왔고 언제까지나 살 것 같던 과수원은 내 기대와는 달리 영원한 낙원은 아니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사 간 집은 좁은 골목의 행랑채였고 단칸방이었으니 넓은 과수원에서 마음대로 뛰어놀던 나는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그나마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이사 간 곳이 낯설지 않은 고구문거리였다는 사실, 거기에 엄마가 철통 같은 방어막을 치며 형과 나를 지켜주었기 때문이었다. 그 무렵 엄마는 카시미론 이불 장사를 하고 있었는데 커다란 이불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골목골목 다니면서 외상으로 이불을 팔았고 그 돈으로 두 형제를 온전히 책임지게 되었다. 거기에 1년이 지나서 작은 형마저 경기도로 전학 가면서 이제 엄마와 나 둘만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때부터 엄마가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원래 엄마는 좀 냉정하고 엄한 편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야단도 치지 않고 약간은 나를 존중하기 시작한 것이다. 중학생이 되었으니 그에 맞는 대접을 해 준건지, 가족들과 헤어지고 과수원을 떠난 내가 안쓰러워서 그러신 건지, 혹은 본인이 외롭고 우울해서 어린 나에게라도 의지하느라 그리 하셨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몇 달이 지나자 나는 고구문거리에 별 탈없이 적응해 갔다. 내가 다니던 중학교와 친구들이 그대로 있었고 충주를 떠난 것도 아니었으니 사실 별 문제가 없기도 했다. 2년 후,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전까지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