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3학년, 고등학교를 골라 시험을 보아야 한다. 내가 다니던 시기는 고교평준화가 시행된 지 3년 차였고 서울 등 5개 대도시를 제외한 대부분의 도시에서는 고교입시를 치르는 시기였다. 공부깨나 한다 하는 충주 출신 중학생들은 주로 청주고로 진학하곤 했다. 청주는 충북의 도청소재지였고 충북선 기차가 있어서 오가기도 편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조금 더 먼 대전고를 골랐다. 대전고가 청주고보다 윗질이라는 평가도 있었지만 내가 이곳을 고른 이유는 좀 달랐다. 어차피 우리 집이 경기도로 이사를 가서 아무런 연고가 없으니 굳이 충주에서 가까운 청주를 택할 이유가 없다는 점이었다.
같은 중학교의 친구 한 명도 대전고를 골랐다. 가난한 과수원집 막내인 나와는 다르게 그 친구의 아버지는 고등학교 교장선생님이셨고 경제적으로도 훨씬 넉넉한 편이었다. 입시를 치르는 아들을 위해서 그 친구의 부모님이 대전까지 따라가셨는데 아들의 친구인 나를기꺼이 일행으로 받아주셨다. 시험 전날, 선화동의 어느 여관을 잡아 한 방에 자게 되었는데 친구와 나의 저녁일과는 달랐다. 나는 대전고에 이미 와 있는 1년 선배를 따라 보문산 전망대로 야행을 나갔고 그 친구는 내일 치를 시험에 대비하여 차분히 최종 점검을 했다. 입학시험에서 그 친구는 200점 만점에 199점을 받았고 나는 193점을 받았다. 당시 커트라인이 191점이었으니 턱걸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여럿 틈에 섞여 얼떨결에 따라 들어간 셈이다.
인구 10만이 겨우 넘는 충주에 비해서 대전은 50만이 넘는 대도시였고 충남도청에서 중앙 데파트와 홍명상가로 이어지는 도심은 화려했다. 이른 봄날 밤, 어느 주택가에서 만난 커다란 백목련은 내가 낯선 도시에 와 있음을 실감하게 했다. 푸른 달빛 아래 하얀 꽃들이 마치 수백 개의 등을 달고 있는 듯, 충주에서는 한 번도 백목련을 본 적이 없던 나는 그 서늘한 아름다움에 잠시 휘청였다.
그러나 대전에서의 유학생활이 기나긴 사춘기와 방황의 시작임을 깨닫기에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먼저 나는 주목받는 우수생에서 평범한 범생이로 빠르게 전락했다. 모범생들만 모인, 속칭 일류고이고 보니 당연한 일이었다. 중학교 때는 아무렇지도 않게 전교 2-3등은 하던 내가 입학하고 처음12등을 시작으로 슬금슬금 밀리더니 곧바로 100등을 넘어갔다.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아버지의 죽음도 나의 방황에 한몫을 했다. 위암과 힘든 투병을 하시던 아버지는 내가 대전에 유학한 지 얼마 안 된 1학년 6월에 돌아가셨고 나는 그제서야 아버지가 내가 속한 세상의 중심이었음을 깨달았다. 엄마를 비롯한 나머지 가족들과 나의 어린 시절과 내가 나고 자란 고향까지도 모두가 아버지를 중심으로 질서 있게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 중심이 무너졌으니 혼란과 상실감은 말해 무엇하랴.
자식 뒷바라지에 관한한 이미 몇 년 전부터 아버지를 대신했던 엄마가 이제는 더 억척스럽게 나섰다. 충주에서는 새우젓과 간장, 이불 행상을 하셨던 엄마가 대전에서 선택한 직업은 고물장수였다. 충주와는 다르게 단골손님들이 없고 시장이 많다보니 보따리 행상이 마땅치 않았으리라. 나를 학교에 보내고 이리저리 일거리를 알아보시던 엄마가 어느 날 고물장수를 하시겠다고 선언하셨다. 문창동의 어느 고물상에서 여자인 엄마를 위해서 자전거 바퀴를 단 작은 리어카를 내주었단다. 나는 엄마가 얼마나 힘들까 보다 창피하다는 생각을 먼저 했다. 친구들이 고물장수 아들이라는 걸 알면 어쩌나, 골목길에서 엄마의 고물 리어카를 만나면 어쩌나. 다행히 고물장수는 벌이가 그런대로 괜찮았고 딱 한 번을 제하고는 엄마의 고물 리어카를 조우하지도 않았다. 아마도 하교시간에 학교 주변을 일부러 피하셨으리라.
엄마와 나는 대흥 국민학교 담벼락에 맞닿은 허름한 옛날 주택에서 사천원짜리 달방으로 시작해서 보문산 자락의 따개비 판자촌, 다시 보문산 계곡 사이의 무허가 주택까지 값싼 월세방으로 전전했다. 그러나 낯선 도시에서 고물 리어카를 끌면서도 엄마는 기죽지 않으셨다. 명문고인 대전고에 턱 하니 입학한 막내아들의 교복을 대견해하시고 고물장수를 하면서도 은근슬쩍 아들 자랑을 하고 다니셨다. 저녁때가 되면 무거워진 리어카를 고물상까지 끌어다 놓고는 행여 늦을까 종종걸음으로 돌아와서 아들 저녁을 챙기셨다. 낯선 도시의 뒷골목을 누비면서 힘들고 배고프고 때로는 멸시에 시달리셨을 텐데, 일절 그런 내색하나 내지 않으셨다. 나는 당연하듯 손도 하나 까딱 않고 앉아서 밥을 받아먹었고 반찬이 부실하다고 투정을 해댔다.
사춘기가 시작되었다. 타향살이와 아버지의 죽음과 가난의 고통이 함께 뒤섞인 지독한 열병의 시작이었다. 나는 학교가 끝나면 아무 시내버스나 잡아타고 종점에서 종점으로 하염없이 돌아다녔다. 대부분의 종점들은 채 개발이 안된 시골이거나 가난한 달동네에 닿아있었으니 목적없이 방황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논두렁과 밭두렁을 걷고 지저분한 골목길을 헤매고 어두워지는 시장통에서 순댓국에 소주를 마시기도 했다. 인생은 무엇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따위의 거창한 고민을 한 것 같지도 않다. 그냥 절망 속에 푹 절여져서 비틀대며 그렇게 헤매고 다녔다. 가슴에는 아릿한 통증이 몽글몽글 피어올랐고 나는 마치 일부러 상처의 딱지를 건드리듯 체념과 자학의 고통을 즐겼다. 성적은 어느새 300등이 넘었다. 야구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전교 꼴찌를 찍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