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방과 재수

by 심웅섭

이쯤에서 나는 잠시 쉬면서 한 호흡 고를 수밖에 없다. 내 인생의 기록이니 자기 성찰이니 호기롭게 시작한 자서전이 이제 열 편째, 아직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했는데 벌써부터 회의가 든다. 자서전은 왜 쓰는 걸까? 위인전을 써서 후세에 영웅으로 남고 싶은가, 자식들에게 너희들은 이렇게 살아라는 교훈을 남기고 싶은가, 아니면 어쭙잖은 글쟁이 흉내로 뒤늦게 작가 대접이라도 받고 싶은 겐가?


이런 회의가 드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나의 과거라고 펼쳐보니 온통 가난과 방황의 자기 고백뿐, 때깔 나고 다이내믹한 플롯은 고사하고 재미나 디테일도 없는 허접한 넋두리가 되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아니, 내 인생이 이렇게나 구질구질했던가, 더구나 아직 절반도 꺼내지 않았는데 말이다.

두 번째 이유는 잊혔던 과거의 아픔을 꺼내어보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것이다. 모두 극복되었거나 최소한 잊혔다고 생각했는데, 그걸 다시 꺼내어 닦다 보니 아프고 미안하고 힘든 마음들이 새록새록 살아나고 있다. 40년 만에 오래된 상처들을 다시 헤집어 살펴보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어쩌랴, 이런 고통들이야말로 내 삶을 오롯이 되짚어보는 과정이라고 굳게 믿고 조금씩 진도를 나가본다.


고등학교 3학년 때는 비교적 평범한 시간을 보냈다. 적당히 공부하고 적당히 산책하고 가끔씩 충주출신 친구들이랑 모여서 술도 마셨다. 한 친구는 산내면의 집성촌 한옥에서 혼자 살았는데 간섭할 사람도 없고 제법 운치 있는 옛날 동네이다 보니 충주출신 친구들의 아지트가 되었다. 시내버스 종점에서 내려 30분쯤 논 사잇길로 걸어가야 하는 수고로움 정도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주말이면 모여서 소주도 마시고 사춘기 고민도 나눴다. 보문산은 열심히 쏘다녔지만 그런대로 마음은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제 암울한 시절이 끝나고 대학생활의 낭만이 시작될 거라는 희망이 나를 안정시키고 있었다. 그렇게 사춘기의 방황은 끝나가는 듯싶었다.


그러나 예상하지 못한 사고가 터졌다. 대학시험에서 뜻하지 않은 낙방을 한 것이다. 내가 대학입시를 보던 1979년만 해도 예비고사와 본고사가 같이 시행되었다. 예비고사는 전국단위로 실시되는 객관식 시험이었고 본고사는 대학에서 자체적으로 실시하는 주관식 시험이 많았다. 학교마다 그 비율은 다르지만 예비고사 성적은 대충 20-30% 정도 입시에 반영되었던 것 같다. 내 예비고사 점수는 269점, 썩 훌륭하지는 않지만 내가 고른 대학에 합격하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점수였다. 불과 1점 차이인 270점이면 예비고사만으로 입학하는 특차전형이 가능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결과는 낙방이었다. 주관식 수학시험에서 어이없는 실수를 두 문제나 했기 때문이다. 후기대학도 괜찮은 곳이 있으련만, 오기에 재수를 선택했다.


재수를 하기 위해서 이사를 한 곳은 현재 가톨릭 대학이 있는 부천의 역곡, 바로 1호선 전철 옆 연립주택이었다. 10분마다 지나다니는 전철의 철커덕거리는 소음과 빼꼼한 창문 밖으로 지나는 사람들의 다리가 보이는 지층 방이었다. 여기서 노량진의 입시학원까지 전철을 타고 다녔다. 그러나 겨우 두세 달을 버티지 못하고 학원을 그만두었다. 혼자 공부하면 더 효과적일 거라는 핑계를 대기는 했지만 어쩌면 앞서 말한 개나리 블루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찾은 곳이 청룡사, 충주시 소태면 오량리의 작고 오래된 절이었다.


청룡사를 찾은 것은 뻐꾸기가 한창 울어대는 6월쯤이었나 보다. 충주시에서 소태면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내리면 작은 국민학교와 문방구가 있는 면소재지이고 여기서 다시 10분 정도 시골 마을길을 걸어가야 오량리, 다시 허물어져가는 흙담을 돌아 오솔길로 20여분을 가야 청룡사가 나타난다. 뙤약볕 아래 목덜미에는 땀이 흘렀고 길 옆에는 담배들이 기이할 정도로 커다란 잎을 혓바닥처럼 내밀고 있었다. 청룡사는

국보와 보물 등을 지닌 고찰이라고는 하나 초라한 기와집에 몇 개의 별채가 흩어져있는 그저 그런 모습이었고 7-8명의 재수생과 고시생들이 머물고 있었다. 다행히 친구들과 함께였기에 덜 외롭기는 하였으나 단조로운 절에서의 재수 생활은 만만치 않았다. 아침이면 고시생들이 함께 모여 밥을 먹고는 각자 자기 방에 들어가서 공부를 하는데 쉬는 시간도 진도도 시험도 없는 나 혼자만의 공부는 생각처럼 잘 되지 않았다.


그래도 다행히 추억거리들은 건졌다. 가끔 생활비(향토장학금이라고 불렀다)가 도착할 때쯤 돈을 모아 회식을 하곤 했는데 한 번은 돈을 모아서 닭을 끓여먹기로 했다. 동네에서 생닭 한 마리를 사 왔는데 문제는 아무도 닭을 잡아보지 않았던 거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닭을 잡고 내장 손질하는 것을 먼발치에서 보기만 했던 내가 무슨 용기인지 나섰고 덕분에 서너 명이 맛있게 닭죽을 먹었던 기억이 난다. 절간에서 닭을 잡을 수가 없어서 제법 떨어진 공터에서 말이다. 문제는 소주를 거나하게 한 잔씩 나눈 후였다. 갑자기 내가 벌떡 일어나서 닭뼈를 가져오겠다고 객기를 부렸다. 친구들이 진심으로 말렸으니 망정이지 자칫하면 칠흑 같은 어둠에 산길을 헤맬뻔했다.


엄마가 보고 싶었다. 부천시의 낯선 변두리 동네에서 고물장수로 고생하실 엄마가 너무너무 그리웠다. 뒷산에 올라보면 동쪽으로는 청계산 위로 흰 뭉게구름이 끝없이 피어오르고 서쪽으로는 산 능선 사이로 남한강이 아스라이 보였다. 저 강을 따라가면 엄마가 계시는 부천이겠구나. 엄마가 보고 싶을 때는 목이 터져라고 노래를 불렀다. 아니, 어쩌면 암울한 내 인생에 대한 울부짖음이었는지도 모른다.


저 푸른 물결 외치는

거센 바다로 떠나는 배

내 영원히 잊지 못할

님 실은 저배는 야속하리

날 바닷가에 홀 남겨두고

기어이 가고야 마느냐


아침저녁으로 찬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쯤이었으니 아마도 9월 중, 하순이었으리라. 나는 다시 엄마가 계시는 역곡으로 돌아왔다. 예비고사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번에도 혼자 공부하기로 했고 매일 서울 남산의 시립도서관으로 출퇴근을 했다. 지하철 서울역에서 내려서 대우빌딩 뒤 언덕길로 올라가면 후암동 달동네가 나타났고 당시로서는 하늘에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그 무시무시한 중앙정보부 건물도 지나다녀야 했다. 다행히 도서관은 열공하는 분위기였고 나에게도 맞았다. 한 시간에 10분씩 스스로에게 쉬는 시간도 주고 점심시간에는 지하식당에서 가락국수 국물에 도시락을 말아먹었다. 정 지루하면 간간히 문학실과 정기간행물실에서 소설과 문예지들을 읽기도 했다.

1979년 10월, 바야흐로 박정희 독재정권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었다. 우연히 전철에서 남들이 남긴 일간지들을 읽기 시작하면서 간간히 알게 된 소식들은 그야말로 탄탄한 구성의 소설과도 같았다. 부마사태니 박종철이니 모든 사건들이 마치 꼬리를 무는 일련의 소설처럼 진행되었다. 누가 봐도 속도를 줄여야 할 텐데, 그러나 독재정권은 브레이크가 터진 열차처럼 전속력으로 파멸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10월 26일,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아니 올 것과는 조금 다른 것이 너무 빨리 온 것이다. 불안했다. 내가 태어나고 기억이 있는 한 대통령은 항상 박정희였다. 박정희는 그냥 대통령이 아니라 국가의 상징이며 국가 그 자체였다. 그 대통령이 죽었으니 이제 우리나라는 무사할 것인가? 또 하나, 박정희가 국민들의 저항에 의해서가 아니라 측근에 의해 피살되었다는 거다. 이건 소설로 보면 절대로 이야기의 결말이 아니다. 새로운 시즌 2의 시작일 뿐이다. 잘은 모르지만 뭔가가 꼬이는 게 아닌가 하는 막연한 불안감이 나를 사로잡았다. 며칠 뒤 광화문에 빈소가 차려졌고 나는 사람들의 반응이 궁금했다. 많은 사람들이 울면서 국화꽃 송이를 바치던 모습, 한복을 곱게 입고 엉엉 울어대는 여인들을 낯설게 바라보았던 기억이 희미하게 남아있다.


이번 예비고사는 283점, 점수는 올랐지만 아마도 백분위는 떨어졌으리라. 작년에 비해서 난이도가 낮아서 평균점수가 많이 올랐단다. 고민 끝에 수원의 아*대학교 불문과에 특차 입학을 했다. 등록금 4년간 전액 면제, 기숙사비 50% 지원, 성적우수자에게 프랑스 유학 및 교수 채용 기회 부여......, 제법 그럴듯한 조건들이 걸린 특별 입학이었다. 남들이 본고사를 보는 날, 나는 전철에 버스를 갈아타고 면접을 보러 갔다. 입학은 이미 확정된 상태로 다른 대학교에 응시를 막기 위한, 일종의 의무 출석이었다. 버스에서 내려서는 곧은 진입로를 따라 10여분을 걸어야 한다. 진입로 옆으로는 논과 밭과 새로 만들어진 하숙촌들이 뒤섞여 묘하게 낯선 풍경을 만들어냈다. 아무래도 자신이 없었다. 내가 원하던 대학교가 아닌 곳에 입학하는 것이 장학금 때문이 아니라 사실은 내 인생에서 도망을 치고 있다는 걸 나 스스로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내 인생 최초의, 혹은 최대의 도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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