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의 봄, 원천 호수로 기억할까나

by 심웅섭

대학생활이 시작되었다. 나는 불문과였는데 인원이 80명이다 보니 A반과 B반으로 나뉘어 있었다. 주로 남학생들이 많았고 여학생은 많지 않았다. 스스로 시간표를 짜고 강의실을 옮겨 다닌다는 점 외에는 고등학교와 크게 다르다는 느낌은 없었다. 선배들은 이런저런 써클에 들어오라고 홍보도 했지만 이미 학교에 만족을 하지 못하는 내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기숙사는 한 방에 세명이 배당되었다. 주로 3-4학년이 방장, 2학년이 부방장, 새로 들어온 신입. 부방장은 2층을 내 침대로 배정해주었고 식사시간이면 나를 챙겨서 구내식당으로 데리고 가곤 했다. 나는 마치 처음 서울에 온 시골쥐처럼 어리바리했다. 가난하기는 해도 자유스럽게 혼자서 방을 쓰고 내 마음대로 하던 나에게 남들과 같이 생활하는 기숙사는 일종의 문화적 충격이었다.

80년 봄이었다. 12 12 쿠데타로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실질적인 정권을 잡았고 박정희 정권보다도 냉혹함을 보이고 있었다. 서울을 중심으로 전국의 대학생들이 들고일어났고 데모와 최루탄은 일상이 되었다. 내가 다니던 아*대학교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정문에는 커다란 방패와 진압봉을 든 전투경찰과 지랄탄을 쏘아대는 가스차가 상주하다시피 했고 거의 매일 수백 명이 모여드는 학내 시위, 그리고 가끔씩 거리로 뚫고 나가는 가두시위가 벌어졌다. 나도 그 시위대의 끄트머리가 되었다. 가끔은 대자보에 개인 의견도 끄적여 붙여도 보고 시위 때마다 참석해서 구호를 외치고 돌멩이도 던졌다. 그러나 이념서클에 들거나 체계적인 공부를 한적도 없고 흔한 화염병(꽃병이라고 했다) 한 번 던져보지 못했다. 불붙은 화염병을 차마 던질 용기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백골단이 무서워서 시위대의 맨 앞에 서 본 적조차 없다. 이 점은 후에 소위 운동권 출신들에게 느끼는 마음의 빚이 되어 평생 부채감을 느끼게 했다.

광주사태(당시 표현대로 하자면)가 일어나고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학교 앞에는 경찰 대신 군인들이 막아섰고 무시무시한 장갑차가 배치되었다. 전국적으로 휴교령이 발표되었고 학교는 물론이고 기숙사도 문을 닫았다.

나는 학교 뒷산 너머 시골 동네에 월세방을 얻어서 자취를 시작했다. 교수사택을 지나 공동묘지를 넘어가면 작은 시골마을이 있었는데 월세가 싸다 보니 나처럼 가난한 자취생들이 찾아들던 동네였다. 낡은 시골집에 허름한 방이었지만 달동네에 익숙한 나는 불편함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솔밭과 논두렁과 공동묘지를 넘어오는 길이 너무나 편안했고 가까이에 원천호수가 있었다.

원천호수는 수원시 원천동에서 이의동으로 걸쳐있는 저수지로 규모가 제법 컸다. 남쪽으로는 유원지가 개발돼있어서 가끔은 여학생들과 보트를 빌려 타기도 했지만 나는 주로 호숫가를 걷기를 좋아했다. 그것도 사람의 발길이 적은 이의동 쪽, 방향으로 치자면 북쪽 언저리의 오솔길을 따라서 말이다. 푹신한 솔잎 낙엽을 밟으며 조용히 걷다 보면 호수에 비친 햇살은 내 눈을 간질였고 솔숲을 건너온 산들바람은 내 뺨을 어루만졌다. 호숫가 길을 걷는 일을 얼마나 좋아했냐 하면 나중에 여학생과 몇 번 데이트를 한 적이 있는데 내가 정한 데이트 코스는 항상 원천호수였을 정도다. 당시에도 데이트 장소 하면 경양식집이나 하다못해 음악다방이라도 가는 시절이었는데, 나에게는 호숫가를 제외한 다른 장소는 아예 후보로 떠오르지도 않았다. 나중에야 여학생이 두세 시간 이어지는 호숫가 산책을 싫어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혼자서 당황했을 정도였다. 화장실도 없고 앉을 곳도 마땅치 않은 인적 드문 호숫가 오솔길을 믿고 따라와 준 여학생에게 이제라도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휴교령이 내려져서 정상적인 수업이나 시험이 불가능하니 과목마다 리포트를 내는 것으로 대신했다. 나는 아무것도 내지 않았다. 1학년 1학기의 내 학점은 0.45, 남들은 두 개만 차도 쌍권총이라고 자랑하던 F학점을 무려 다섯 개나 받았다. 더 이상 학교에 다니고 싶지 않았다. 엄마에게는 데모하느라고 성적이 모자라서 등록금을 내야 한다고 거짓말을 하고 타낸 등록금으로 여행을(사실은 무단가출) 떠나 버렸다. 뭐 어차피 학교를 더 다닐 것도 아니라서 휴학계도 내지 않았다.

목포로, 부산으로, 동해안을 따라 강릉과 설악산을 거쳐 나중에는 청주까지 흘러 다녔다. 돈이 떨어져서 원주에서 충주까지 걷기도 했고 친구 집에 빌붙어 얻어먹기도 했다. 사직동 터미널 부근의 짜장면집 배달부도 해보고 훔친 리어카로 센베이 장사도 해 봤다. 나는 아직까지도 그 몇 달간의 행적을 소상히 기억하고 기록할 자신이 없다. 어쩌면 내 인생에 최고로 힘들고 아픈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곪아 터진 상처에 새살이 돋듯이 조금씩 삶에 대한 의지가 생겨나고 있었다. 어쩌면 바닥을 친 느낌이랄까, 뭔지는 몰라도 해낼 것 같다는 느낌이 스멀스멀 들었나 보다. 첫눈이 내리던 날, 나는 알 수 없는 충동에 친구 자취방에서 돈 만원을 훔쳐 들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몇 달 만에 돌아온 나를 엄마는 마치 며칠만에 돌아온 듯 아무렇지도 않게 맞으시고는 맛있는 저녁을 정성껏 차려주셨다. 나는 아무런 설명도 사죄도 없이 그 밥상을 묵묵히 다 비웠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낙방과 재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