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워, 수고했어, 그리구 잘했어

육십을 넘긴 내가 스무 살의 나에게

by 심웅섭

무단가출에서 돌아오면서 나의 사춘기 방황은 끝났다.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시작해서 대학교 1학년까지, 5년간의 지독한 방황이 막을 내린 것이다. 사춘기가 그렇게 무 자르듯이 시작과 끝이 정해져 있냐고 물으면 할 말은 없지만 왠지 그만하면 됐다는, 바닥을 쳤으니 이제는 끝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으니 어쩌랴.


뭔가를 하고 싶었다. 그 '뭔가는'은 일단 공부는 아니었다. 책과 활자에 갇힌 성현들의 말씀 속에서 진리를 찾는 것도, 지식산업의 소비자가 되어 끝도 없는 허영과 갈증 속에 방황하는 것도 내 선택은 아니었다. 그러기에 나의 세상은 너무나 리얼했고 내 가슴 깊은 곳에서 꿈틀대는 원초적인 삶의 의지는 강렬했다. 머리가 아닌 몸으로 부딪히며 몸으로 세상을 익히리라. 아르바이트들을 시작했다. 내가 아는 한 최대한 힘들거나 바닥인생이 할 것 같은 아르바이트들이었다. 우선 경양식집 서빙부터 시작했다. 부평역 부근의 어느 경양식 집에서 나비넥타이를 매고 손님들에게 자리를 안내하고 주문을 받고 접시를 날랐다. 좁고 어두컴컴한 공간에서 몇 시간씩 맴도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육촌 매형의 소개로 인천 송도 나이트클럽 화장실에 자리를 잡았다. 술 취한 손님들이 오줌을 누면 뒤에서 괜히 향수를 뿌려대고 물수건을 건네는 일이었다. 기분에 천 원짜리 지폐를 턱 내는 사람도 간혹 있었지만 모욕적인 상소리를 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무엇보다도 냄새나는 화장실에서 일한다는 사실이 힘들었고 수입도 그리 많지 않았다. 게다가 번쩍이는 싸이키 조명과 시끄러운 음악, 술 취한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묘한 분위기도 낯설었다. 새벽 5시면 울리는 엔딩 음악이 유일한 낙이었다.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다음에 또 만나요.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다음에 다시 만나요"


다음으로 시작한 일은 지하철에서 신문을 파는 일이었다. 나는 무작정 서울역 지하철의 신문 가판점을 찾아가서 일을 구했고 남영역에서 청량리역까지의 조간신문을 배당받았다. 신문 한 부당 60원에 사서 100원에 팔면 한 부에 40원이 남았다. 파란색 제복에 왼팔에는 신문 더미를 걸치고는 그 복잡한 손님 사이를 뚫고 외쳐댔다.


조선한국일간 스포오오츠 100원씩 신문이 백 원이요 특종기사 100원이요,

아침신문 100원씩 특종기사 100원이요.


그러나 내가 가장 만족한 일은 고물장수였다. 고물장수는 엄마가 대전에서 하던 일이었으나 부천으로 이사 오면서부터 그만두셔서 다행히 모자가 동종업종에 종사하지는 않았다. 우선 고물장수는 복장과 소품이 맘에 들었다. 지저분한 옷과 신발은 역설적이게도 거지로 분장한 왕자 같은 묘한 안도감을 주었다. 아무도 나를 몰라보리라는 생각과, 결국 나는 거지가 아니라 거지처럼 보이는 왕자라는 다소 건방진 생각이었으리라. 고물상에서 빌려준 엿가위와 저울도 맘에 들었다. 커다랗고 시커먼 엿가위를 마치 거리 공연하듯이 내 맘대로 철컥철컥 쳐 댔다. 착 착 착, 착 착 착, 착 착 착 착 착 착 착......, 내가 아는 유일한 리듬인 337 박수에 맞추어서 말이다. 그런데 가위질도 처음부터 멋지게 소리가 나는 것이 아니고 연습이 필요하다. 엄지와 나머지 네 손가락을 나누어 가위의 손잡이에 넣고는 가위질을 하는데 꽉 움켜잡으면 떨꺽떨꺽 둔탁한 소리를 낼 뿐이다. 손가락 위에 가위를 올려놓듯이 띄운 상태에서 두 손을 오므리는데 양 날이 닿을 때쯤 적당히 힘을 빼는 것이 요령이다. 그래야 소리가 크고 청아하며 여운이 오래간다. 리어카를 끌고 새로운 동네와 골목을 들어설 때마다 나는 신나게 엿 가위질을 해 댔다. 엿장수가 엿 가위질한다고 뭐랄 사람은 없었다.

저울은 20kg짜리 대저울로 끈으로 만든 손잡이를 중심으로 한쪽에는 물건을 매다는 쇠고리가, 반대편에는 조그마한 저울 눈금들이 쥐눈처럼 총총히 박혀 있었다. 고물이야 대충 튀밥 한 그릇 퍼 주거나 빨랫비누 한두 장에 얻는 경우가 많았고 저울은 아주 가끔씩만 필요했다. 값나가는 고철이나 책이 제법 많을 경우에만 말이다. 나는 선배들이 가르쳐 준대로 저울눈금을 속여먹었다. 무게를 달 때 왼쪽에는 사려는 물건이, 반대편인 오른쪽에는 저울 추가 자리 잡게 된다. 이때 손잡이를 바짝 잡고 저울추 쪽 저울대를 새끼손가락으로 꾹 누르면 웬만한 무게는 속여먹을 수 있었다. 양심의 가책은 없었다. 나는 고물 장수니까. 아무 데나 리어카를 세워놓고 쉬기도 했고 신호등을 어기고 대충 차도를 건너기도 했다. 한적한 곳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오줌을 누기도 했다. 욕하는 사람은 없었다. 왜냐하면 고물 장수니까. 벌이도 괜찮았다. 소주병 20원 4홉 병 30원, 물랭이(플라스틱) 40원, 고철 80원 신철 100원....., 하루 2-3 리어카를 모아 오면 요것들이 만원이 넘었다. 당시로서는 꽤 짭짤한 수입이었다. 은근히 자신감이 붙었다. 고물장수까지 했으니 무얼 못할까? 과일장수든 채소장수든 기죽지 않고 세상을 살아갈 것 같은 원초적인 자신감이 생겼다. 세상에는 공부와 출세 말고도 살아가는 방법이 많았고 나는 무엇이든 잘할 것만 같았다. 고물장수는 이듬해 4월, 군에 입대하기까지 몇 달간 이어졌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사춘기를 40여 년 만에 자서전을 핑계로 다시 만났다. 우선 스무 살 때의 절망과 설렘의 묘한 감성이 아직도 생생히 남아 있는 것이 놀랍다. 바로 몇 해 전의 일인 듯, 아니 아직도 그 시절에 살고 있는 듯한 생생하고 익숙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어쩌면 나는 스무 살에서 성장을 멈춘 채 나머지 인생을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른의 눈으로 되돌아보며 냉정한 질문들을 던져도 본다. 도대체 무얼 그리 고민하고 방황했던가, 그 당시에 적절한 인생의 멘토를 만났다면, 좀 더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었다면, 혹은 원하는 대학교에 합격만 했더라면 그런 방황은 없지 않았을까, 내가 만일 그 시절로 되돌아가서 인생을 다시 산다면 더 잘할 수 있을까?....., 그러나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고 해도 더 이상 잘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책이나 스승에게 배우지 않고 몸으로 부딪히며 살기로 한 선택을, 그것이 설혹 가난과 불운으로 인한 기회의 부족이라고 해도 바꾸고 싶지는 않다. 아니,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더라도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다소 건방지게 들리겠지만 나는 나름대로 주변의 인정과 가족들의 사랑을 받으며 별 탈없이 살아왔다. 돈을 많이 모으지도 못했고 사회적으로 높은 자리에 오른 것은 아니지만 내 인생을 내가 선택하면서 눈치 보지 않고 살아왔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런 나의 삶의 방향을 선택한 것은 다름 아닌 스무 살의 나 자신이었다. 이제 머리 희끗한 60대 은퇴자가 스무 살의 나를 만난다. (넷플릭스에서 봤음직한 설정임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지금보다 훨씬 더 초롱한 눈망울과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우수가 묘하게 뒤섞인 스무 살의 나는 다소 의심스러운 눈으로 60대의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나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조용히 다가가 그의 어깨를 감싸 안는다. 그의 숨결이 고요해지길 기다려 조용히 어깨를 두드린다. 그리고 속삭이듯 짧게 한마디를 해 주고 싶다.


고마워,

수고했어,

그리구 잘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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