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피지 않아도 괜찮은 날, 가을

새벽시

by 봉킹

날이 차가워지니, 머릿속 따스한 기억이 더욱 그리워집니다.


아직은 꽃이 피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어떤 꽃도 내게 없다는 사실이 서글퍼 오랜 시간 꽃을 노래하곤 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꽃을 갖고 싶다면 먼저 꽃을 길러야 한다는 걸 왜 몰랐을까요.
노래만 부르다 보니 어느새 여름이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영원할 것 같던 뜨거운 공기도 이제는 차갑게 식어버렸네요.

이렇게 된 이상, 잠시나마 꽃을 가졌던 기억과
그 꽃을 피워내려 애썼던 순간들을 하나씩 떠올리며
꽃을 그려보아야겠지요.

멀리 바다 건너 하나의 꽃씨가 날아왔습니다.
땅은 온통 검은 화산암이었지요.
꽃씨는 그 땅에 내려앉아 싹을 틔우곤, 다시 바람을 타고 떠나버렸습니다.
함께 맞이했던 여름날의 일출과
걸었던 그 바닷길을 뒤로한 채로요.

그러던 어느 날, 바람이 바뀌고 북풍이 불어왔습니다.
꽃씨는 다시 돌아와 땅에 내려앉았고
드디어 꽃잎을 하나둘 피워냈습니다.
그렇게 바다와 바람, 땅이 함께 만들어낸 꽃은
곧 시들고 말았습니다.
아마도 땅이 너무 척박했기 때문이겠지요.

꽃잎이 떨어지기 전, 꽃은 땅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내가 본 것 중 가장 아름다운 화산석이에요.”
그 말 한마디가 남아,
땅은 여전히 시들어버린 첫 꽃을 그리워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을바람을 타고 또 하나의 꽃씨가 날아왔습니다.
이번에는 마치 연기처럼 슈웅—
어쩐지 방구차 뒤의 뿡뿡이 같기도 했습니다.
그 꽃씨는 감귤향이 나는 게 좋다고 했었죠.
검은 화산암은 감귤밭 친구들과 어울리며
그 향을 묻히고 다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둘은 바다를 건너고, 강을 따라 걷고,
모래사장에서 구멍 사진을 찍으며
‘이제 곧 꽃을 피우리라’ 희망을 품었습니다.
그러나 막 자만이 피어날 즈음,
바람은 다시 꽃씨를 데려가 버렸습니다.

넉넉하지 못한 땅은
애써 키운 싹조차 바람에 지켜내기 어려웠습니다.
어쩌면 꽃노래를 부르며
땅을 두껍고 포슬포슬한 흙으로 만들어가는 일이야말로
가장 예쁘고 오래가는 꽃을 피워내는 과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땅은 오늘도,
새로운 꽃씨를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저는 시트러스 향의 핸드크림을 좋아합니다.
어느새 제 취향이 바뀌어 있더군요.
록시땅의 **시트러스 버베나**가 가장 안정적인 향을 뿜어냅니다.

오늘도, 독자 여러분께
거센 바람보단 향기로운 살랑바람이 머물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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