넋 놓고 손가락만 까딱이며 늦여름과 가을을 보냈습니다.
원래 농사꾼은 이철이 가장 바쁘고, 또 가장 보람차다 하지요.
여름 내 정성껏 길러낸 꽃들과 작물들이 경매장에서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나니,
그만 넋을 놓아버린 듯합니다.
사람들은 인생도 농사라고 말합니다.
예전에는 그 말을 그저 좋은 비유쯤으로 들었는데,
요즘 들어 그 말이 자꾸 떠오릅니다.
아마 알고도 모르는 척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건축학도는 작가이면서 동시에 이야기를 파는 상인 같습니다.
이번 여름, 저는 두 가지 공모전에 제 새끼들을 내보냈습니다.
가장 행복했던 기억을 품은 제주의 공공주택 공모전,
그리고 오랜 고민 끝에 다듬은 목조건축 공모전이었습니다.
제주의 공모전은 ‘지방 소멸’을 문제로 삼고,
그 해법으로 농업 공동체의 확장을 제안했습니다.
제주는 월동작물과 당근, 양배추 생산량이 전국 최고지만
농업경영인의 30% 이상이 70대 이상이며,
40대 이하의 비율은 15% 남짓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저는 새로운 농업 방식으로 노동 효율성을 높이고,
공공주택 안에 가공과 판매 공간을 마련하여
청년층이 스스로 농업을 지속할 수 있도록 제안하였습니다.
목조건축 공모전은 1학기 내내 다루었던 복합문화공간을 발전시킨 결과였습니다.
지역 전통주를 매개로 세대가 어우러지는 놀이터를 상상하였습니다.
성인과 청년은 지역 음식을 곁들여 술을 나누고,
아이들은 나무 놀이터에서 뛰노는 — 그런 이상향을 그렸습니다.
대상지의 주민들과 인터뷰를 진행하며 느낀 것은
원주민과 이주민 사이의 미묘한 온도 차였습니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임대인과 임차인의 문제이기도 하였습니다.
도시재생이라는 이름 아래 많은 프로젝트가 이루어지지만
그 주체가 불분명하다 보니,
서로의 욕망만이 뒤섞여 거무튀튀한 그을음처럼 번져가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 속에도 진주는 있었겠지요.
다만 젊은이들의 열정이 타인의 욕망 속에서 조금씩 식어가고 있었습니다.
전통주를 주제로 하다 보니 여러 사업가분들을 만났습니다.
한 분은 말씀하셨습니다.
“술을 팔려면 아이가 함께할 무언가가 있어야 합니다.
하다못해 술빵이라도 같이 만들어야 하지요.”
또 다른 분은 단호히 말씀하셨습니다.
“막걸리는 절대 싼 술이 아닙니다.”
그 말에서 제대로 빚은 술맛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졌습니다.
이렇게 두서없이 적다 보니,
이랑이 아니라 고랑에 모종을 심은 기분이 듭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허무주의는 낙관주의의 그림자 같은 것,
자라지 못한 모종을 갈아엎고 그 자리에 보리라도 심으면
다시 올봄을 기다릴 수 있을 테니까요.
이제는 손가락만 까딱이며 보내지 않고,
두 발로 걸어가 보려 합니다.
언제나 읽어주시는 여러분, 고맙습니다.
기대해 주십시오.
이게 여명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