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린 바다에서 빵과 커피를 먹을까?

by 봉킹

나는 어제 오랜만에 내가 애정하고, 엄마와 오붓하게 커피를 마시길 꿈꾸었던 그런 바다에서 빵과 커피를 먹고 왔다. 비록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내가 꿈꾸던 것들이 비현실화되었다. 그런 시점에서 돌아보니 바다 앞에서 먹는 빵과 커피에 숨어있는 비현실적 공간감이 눈에 들어온다.


렘 쿨하스는 현대 건축에서의 '무맥락의 맥락성'을 주장하였다고 들었다. 너무나 세분화되고 각각의 건축물이 상징하는 요소들이 무한하게 증대되어 갈 때, 맥락성의 소멸로 가는 것이 어쩌면 현대 도시 조직에서 만들어지는 새로운 맥락이라는 뜻으로 이해하곤 한다. 하지만 맥락(Context)은 건축 이전에 존재하던 요소들과 그 대상지가 이루던 관계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맥락의 정의가 새롭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건축학과 설계 수업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단어이자 근거는 맥락(Context)이다. 매 설계에서 학생들이 그려가는 설계 도면과 그림들은 항상 맥락에 기반하여 논리적인지를 평가받고, 부족한 논리들을 채워가는 방향으로 설계가 진행된다. 5년여의 프로그램 기반에는 '맥락을 이해하고 분석하는 데서 설계를 진행하라'는 말이 깔려 있다.


시골 동네 소년의 입장에서 회상해 보자면, 어릴 때 아빠 차를 타고 기장의 해변 도로를 달릴 때면 언제나 소나무 숲과 낮은 건물들 사이로 바다를 볼 수 있었다. 아빠의 청춘 이야기 속에는 저 해변에서 낚시를 하면 무엇이 잡혔고, 저기는 옛날에 군인들이 근무를 섰다는 식의 옛날이야기들이 담겨 있었다. 당시에 그곳은 해변을 따라 내려가 작은 게 들도 잡고 라면도 끓여 먹으며 자유롭게 놀다 쓰레기만 잘 치우면 되는, 그런 열린 공간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런 숲과 해변들이 사라졌다. 소나무들이 잘려 나가고, 나지막하게 존재하던 양식장들이 문을 닫고, 커다랗고 힘 있는 목소리를 내는 덩어리들이 들어섰다. '무맥락적 베이커리 카페'들이 해변을 차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맥락을 잘라먹고 들어앉은 덩어리들은 '자연의 수용'과 '자연을 바라보는 행위'로서의 맥락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의 맥락은 전제조건을 가지고 있다. '건물의 이용자=소비자'로 맥락의 참여자를 제한한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건물의 이용자 제한은 당연한 것이겠으나, 그로 인해 발생하는 대상지의 공공적 맥락을 무시하는 것이 진정 고도화된 사회의 당연한 논리인지는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지금 바닷가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목격하고 싶다면, 고개를 들어 가장 크고 위압적인 목소리를 내는 ‘건축적 덩어리’들을 쫓아가면 된다.


그 공간들은 대개 감각적인 건축가들의 작품으로, 지역 건축상 이상의 수상 이력을 보유한 채 방문객들의 감각을 자극하는 세련된 요소들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이 주장하는 지역성과 맥락은 오직 저토록 큰 목소리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인가. 물론 그것이 건축주의 요구를 합당한 방식으로 수용한 최선의 결과물일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 거대한 덩어리들이 들어서며 끊어버린 ‘풍경의 공유’라는 맥락을 생각하면, 세련된 건축물 뒤에 남겨진 삭막한 단절이 못내 씁쓸하게 다가온다.


우리는 당연하던 공공적 가치를 잃어가고 있다. 재산권이라는 가치의 무게를 존중하면서도, 공공성을 어떠한 방안으로 우리 삶에 남길 것인지에 대한 모두의 고민이 필요하다. 그들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서비스는 너무나 만족스럽지만, 굳이 따지자면 바다를 향한 시야를 포기했을 때도 그 서비스들이 과연 합당하게 느껴질 것인지 묻고 싶다. 바다는 자연이고 우리 모두에게 열려 있어야 하는 가치가 아닌 것인지. 감각적인 덩어리들이 모든 여백을 메워 자연을 완전히 가려버리지 않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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