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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면 Apr 12. 2024

여름풀

당신은 푸릇푸릇한 여름풀을 이야기했습니다

제겐 누렇게 바랜 채 죽어버린 풀만 보였지만요


당신은 해맑은 아이들을 이야기했습니다

제겐 천천히 늙어가며 동시에 죽어가는 운명만 보였지만요


당신은 조용하고 사려 깊은 저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는 당신 말이 두려워 숨어 든 채 한동안 빛을 피했습니다


당신은 밤하늘에 뜬 몇 없는 별을 보면서도 노래를 불렀습니다

어둠에 뚫린 간헐적인 구멍으로 쏟아져 내려오는

날카로운 허무에 찔린 제가 참지 못해 침묵이라도 하는 날엔

당신은 그저 웃으면서 그런 날도 있는 법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어느 날 책 속에서 

어둠을 갉아먹는 무수한 별들을 발견해 

당신에게도 보여 주고 싶어 

등잔에다 별빛을 담아 두었습니다


당신은 이미 사라졌지만요, 

인연의 이치대로 말입니다


몇 없는 별들마저 사라진 캄캄한 밤하늘 아래에서

등잔을 오래도록 바라보는 제게도 

푸릇푸릇한 여름풀이 돋아나고 있습니다


여름풀은 밤하늘에 내리는 별을 수 없습니다

가을이 오면 별빛을 담아 둔 등잔을 줄기에 매단 채

노래를 부르면서 다음해살이풀을 떠올릴 것입니다


당신이 가르쳐 준 대로

그런 삶도 있는 법이니까 말입니다


저녁 어스름에 풀잎이 떨리며 

들어 본 적 없는 노래를 밤으로 흘려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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