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것들을 나열하다 보면 행복해질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무엇을 좋아하나.
나는 평화를 사랑한다. 싸움 없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웃고, 미래가 암담하다 할지라도 현재를 즐기자며 맥주를 한 캔 따는, 그런 평화를 사랑한다. 하지만 그런 평화는 오래 지속되면 권태가 되곤 했다.
권태를 이겨내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테지만, 내가 택한 방법은 다소 비겁한 쪽이었다.
책을 읽는 것.
그것도 아주 비극적인. 도저히 희망을 찾아볼 수 없는 상황에서 고뇌하고 고문당하는 등장인물의 모습을 보며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격정과 감정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고, 체내에 응축된 불쾌한 감정들과 함께 배출했다. 푸후후. 참았던 날숨을 수면 위로 용솟음치게 하는 고래처럼. 수조에 갇힌 어린 고래처럼 나는 책을 읽고 자주 울었다.
나는 평화를 좋아하나, 평화의 다른 이름인 권태를 두려워했고, 그것을 덮어두기 위해 책을 읽었다. 그 변증법적 행위의 끝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책이 마치 나의 운명 같았다. 그것이 나의 정체성을 이루도록 오랜 세월을 썼다. 후회하지 않는다. 그러려고 노력 중이다.
책을 좋아하게 된 내가. 책을 쓰는 일을 하고 싶어 하게 되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고, 어찌 보면 자기 객관화 능력의 결여였다. 음악을 좋아한다고 해서 누구나 작곡가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지 못했다.
요즘은 하루의 많은 시간을 후회하지 않으려고 소비한다. 대학 시절 미루어두었던 전공 공부를 다시 하는 것도 그 노력의 일환이다. 집에 남아있는 전공 서적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그때는 그렇게 읽기 싫었던 문장들이 지금은 한줄한줄 가슴에 와닿았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우리가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지 않으면 안 되는 계기는 우리가 비참해졌을 때이다. 괴로움을 참을 수 있는 한도까지 괴로와하고 삶의 모든 것을 뼈저리게 아픈 하나의 상처로서 생각할 때이다. 절망을 호흡하고 희망의 빛을 아주 잃어 버렸을 때이다. 그리고 그 비참한 가운데서 혼자 외롭게 자기 인생을 응시한 끝에 그 벅차고도 아름다운 잔인성에 질려 이미 삶의 의미를 파악할 수도 없고 이미 사는 문제에 관여하지 않으려고 할 때 그때야말로 우리의 귀는 기막히게 멋진 시인의 음악을 듣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이미 관중도 아니고 애독자도 비평가도 아니다. 그때 우리는 그의 작품 속의 불쌍한 인간들의 형제로서 그들의 괴로움을 더불어 괴로와하고, 그들과 더불어 한구석으로 쫓겨나 숨을 헐떡이면서, 삶의 소용돌이와 죽음의 영원한 광경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도스토예프스키의 음악, 그의 위안, 그의 사랑에 귀를 기울여 비로소 등골이 오싹한 지옥의 모습과도 같은 그의 세계의 야릇한 의미를 체득하는 것이다."
-헤르만 헤세
문학이론서에선 문학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하며 헤르만 헤세의 말을 인용했다. 나는 대문호의 박제된 말 앞에서 경이를 느꼈다.
문학을 배우느라 써버렸던 수년의 세월이 너무나도 자랑스럽게 느껴졌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은 세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그리고 헐벗고 길 잃은 자들을 위하여 허름한 판자촌을 그 세계에 짓는 것이다.
문학은 빵이 될 수 없다.
문학은 결코 그 누구도 배부르게 할 수 없다.
문학만을 섭취한 자는 아사할 운명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문학은 빗물도 바람도 막아낼 수 없는 낡은 집이 될 수 있다. 그곳에서 우리는 안락함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어느새 우리 곁에 와있는 또 다른 우리들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도무지 낙관적으로 볼 수 없는 '삶'이란 것에 대하여 천천히 음미할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된다. 기나긴 만찬의 시간 후, 우리가 내릴 결론은 한 가지로 귀결된다.
세계는, 삶은 야릇하다. 열역학 제2법칙에 따라. 엔트로피는 결코 감소할 수 없다. 세계는 탄생과 동시에 소멸의 비탈길을 따라 내려가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비탈길에 일순 머무는 생령들은 삶을 있는 힘껏 살아낸다. 필연적인 고통과 죽음을 알면서도. 그것이 마치 숙명이라는 듯이. 때로는 그것들을 한없이 골계하며. 때론 서로를 죽이고, 서로를 사랑하고, 서로를 저주하며, 서로를 용서하며. 오묘하기 그지없는 것이 세계이고 삶이다. 그 진실을 깨우치게 하는 것이 문학의 역할이다.
삼라만상의 야릇함이 나를 전율케 한다. 결코 악도, 선도 아니다. 오롯한 오묘함이다..
나는 무엇을 좋아하나.
나는 문학을 좋아한다. 이젠 어디서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