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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를 기다리며

기다리면 항상 오는 그대를 생각하며

by 라면

요즘 나의 기상 시각은 열한 시 반쯤이다.


잠에서 깬 나를 가장 먼저 맞이해 주는 것은 겨울 추위이다. 내복이며 잠옷을 껴입어도 아침 한기는 살갗 안쪽을 시리게 한다. 온몸을 움츠리며 겨우 침대에서 일어나는 순간부터 다시 눕고 싶은 욕망과의 싸움이 시작된다. 물을 마셔 입 안을 헹군다. 약 500ml를 내리 마신다. 그러고 나면 정신이 조금 든다. 발끝을 펴고, 어깨를 펴고, 가슴을 펴고. 근육과 뼈로 우두득 소리를 내고. 오늘도 하루가 시작되는구나. 그래, 오늘도 그런 하루가. 마음속에선 불평에 가까운 쪽으로 속삭임이 재생된다.


따뜻한 물로 몸을 적신다. 겨우 억눌렀던 졸음이 스멀스멀 마수를 뻗친다.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양옆으로 천천히 흔들면 졸음은 잠깐 떨어져 나간다. 겨울만 되면 하얗게 얼음꽃이 피는 내 손으로 얼굴과 머리카락을 문지르며 씻는다. 그럴 때마다 얼음꽃은 더 번져 나간다. 샤워가 끝나고 몸을 말리면 손바닥에 하얗게 폭설이 내려 있다.


'박탈성각질융해증.'


손발바닥 피부가 얇은 판처럼 벗겨지는 만성 질환. 어렸을 때부터 나는 건조해지는 가을이나 겨울이 되면 손바닥 피부가 하얗게 벗겨졌다. 처음엔 습진인 줄 알았다. 그러나 이 증상은 봄만 되면 말끔히 사라졌다. 어느 해는 가을, 겨울이 되어도 증상이 발현되지 않았다. 방심하고 있는 채 다음 해 겨울을 맞으면 한 해를 넘긴 만큼 참아 왔던 눈꽃이 손바닥 위에 내려앉는다. 가렵거나 아프거나 하진 않다. 다행히도. 하지만 올해 겨울은 조금 따가운 느낌이 든다. 올해가 지난해 들과 비교했을 때, 무언가 특별한 점이 있다는 것일까. 핸드크림을 치덕치덕 바른다. 손은 한껏 향기로워지지만, 이 크림은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몇 분만 지나도 크림의 유분은 사라져 버리고, 다시 가뭄이 든 손금 위에 눈이 펑펑 나린다. 백석의 시를 인용하면, 가난한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에, 올 겨울은 눈이 푹푹 나리는 거겠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다귀>,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눈이 푹푹 나린다


시와 소설 안에선 가난이 그리 혐오스럽지 않다.


가난한 자들만이 낭만을 만끽할 수 있고, 가난한 자들만이 쌀알과 배춧잎과 종지 그릇에 숨어 있는 이데아를 볼 수 있다. 가난한 자의 사랑이 눈을 '푹푹' 나리게 하고, 흰 당나귀를 응앙응앙 울게 한다. 현실계의 가난은 다르다. 한없이 사람을 비참케 하고, 이데아를 복제한 두 번째 침대 위에 고달픈 몸을 뉘임으로써 지루하고 치열했던 하루를 마무리짓게 하는. 운명의 지시가 이곳의 가난이다.


나는 가난하지 않다. 부유하다곤 절대 할 수 없지만, 가난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나는 가난하다. 배곯은 적 없는 내가 가난한 것은 어떤 종류의 기만에 속하는가를 곰곰이 생각한다. 가난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이룰 수 없었다는 자기 합리화일까.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의 상투적인 은유일까. 이름을 되뇌는 것만으로도 의미 모를 낭만을 불러일으키는 정오를 기다리며. 가난한 시인과 나타샤와 흰 당다귀를 손금 위에 불러본다.


시계를 본다. 시각은 열한 시 오십팔 분. 정오가 머지않았다. 침대에 걸터앉아 오늘 할 일을 헤아려 본다. 가슴이 답답하다가도 설레온다. 전 직업에 비하면 이번 직업은 나를 살아있게 한다. 적성에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작년 이맘때, 출근하기 전에 침대에 걸터앉아 하던 생각들보다는 확연히 더 발랄하고 생동감 있는 이미지들이 서로 손을 맞잡고 춤을 춘다. 겨울 햇살은 그 중심에서 오래된 신령처럼 앉아 축사를 듣는다.


블라인드를 올린 창문이 환하다. 정오를 기다리는 몇 분의 시간. 눈 몇 번 감았다 뜨고, 몸을 이리저리 돌리면 지나가 버리는 찰나. 햇빛이 아주 조금 움직이는 것을 관찰한다. 거미처럼 방바닥을 기어 다니는 것을 내려다본다. 물기가 말라가는 몸을 내려다보면, 거기에도 햇빛이 묻어있다.


정오가 온다. 시침과 분침과 초침이 합쳐진다.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내쉬며 가방에 준비물을 쓸어 담는다. 블루투스 이어폰을 귀에 꽂고, 플레이리스트를 뒤적인다. 썩 마음에 드는 음악은 없으나, 제목이 아름다운 노래를 찾아낸다. 나의 나타샤. 너를 떠올리게 하는 노래이다.


문을 나선다.

햇빛의 세월로 걸어 들어가는 발걸음이 가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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