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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

받쳐 줘요, 움직여 줘요.

by 라면

버스 정류장까지 서둘러 가는 동안은 보통 앞만 본다. 초점이 앞에 맞춰져 있으면, 주변의 풍경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은 평소와는 다른 무언가를 보았다. 맨살이 드러난 다리였다. 상아빛이 도는 맨다리가 개구리 뒷다리처럼 구부러진 채, 건물 출입구 밖에 놓여 있었다. 특이한 풍경이었으나, 가던 길을 멈추진 않았다. 그냥 누군가 무릎을 구부린 채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었던 것뿐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정류장으로 걸어가는 중에 타야 하는 버스가 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운이 좋았다. 곧바로 버스에 탔다. 노약자와 장애인들을 위한 좌석이 대부분인 저상형 버스였다. 일반인도 탈 수 있는 좌석이 하나 비어 있었으나, 높은 단 위에 놓여 있는 의자였다. 어차피 오 분도 안돼 내릴 거리였기에 의자에 앉지 말고 그냥 서 있기로 했지만, 그 결심은 십 초도 가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편하게 가야지. 다리를 구부렸다 펴며 의자 위에 올라앉았다. 그 순간 다시 그 다리의 형상이 머릿속에서 어른거렸다. 약 오 분. 짧은 그 시간 동안 다리에 대한 여러 생각들이 마구잡이로 피어났다.


그 다리는 사람의 것이었나. 그렇다면 왜 나는 다리의 형상밖에 기억하지 못하는 걸까. 그 다리는 그곳에서 그렇게 구부러진 채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수많은 대상 중에 그 다리가 유독 내 눈에 밟힌 이유는 무엇일까.


그래. 어쩌면 그 다리는 오늘의 계시인 걸지도 몰라.


괴이한 결론에 이른 나는 버스에서 내려, 신호를 기다리는, 어딘가로 걸어가는 사람들의 다리를 보았다. 옷 속에 숨은 무수한 다리들을. 지탱하고 움직이게 하는 인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길고 굵은 촉수들을. 이 다리가 나에게 주려고 한 가르침은 무엇이지. 나에게 일러주려고 한 메시지는 무엇일까.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고뇌했다.


일터에 도착해 의자에 앉았다. 그때부터 다리는 아무것도 지탱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다리가 지탱하는 무언가와 다리를 지탱하는 무언가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생각했다. 다리는 사람의 몸을 지탱한다. 하지만, 몸이라는 단어 안에는 당연히 다리라는 신체 일부가 포함된다. 다리가 지탱하는 것은 그렇다면 몸이라는 인간의 외연적 실재에서 다리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지. 다리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에는 또 각자만의 기능과 특징이 있을 거고. 그것들이 일련의 작용을 통해 다리라는 신체 일부를 유지하고, 동력을 제공하는 거겠지. 그러나 이 모든 당연하기 짝이 없는 생각들의 연쇄에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계시를 받아도 그것을 해석하지 못하니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어쩌면 그 다리를 계시라고 받아들인 것에서부터 잘못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계시를 번역하는 거룩한 수사의 머릿속에선 떠올라선 안 될 불경한 의심이었다.


생각만으로는 아무 결론도 낼 수 없으니, 기록을 위하여 글을 쓰기 시작했다. 상념들에 일일이 기호와 문자를 덧씌우며. 오늘치의 나를 움직이게 만든 의식과 사고를 적나라하게 적어 내려간다. 기표화된 생각들을 보고 있자니, 무언가를 좀 알 것 같기도 하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내겐 과제가 있다. 스스로 설정한 것이다. 하루에 2000자 분량의 글을 써 내려가보자. 매일 쌓여가는 이 글밥을 통해 되든 안 되는 작가라는 꿈에 도전해 보자. 그래서 나는 다리라는 대상이 내게 어떤 영감을 가져다줄 영험한 신물이라 여겼던 것이다. 나는 허벅지를 툭툭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무한 결론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얻은 것이 없지는 않았다. 그 다리를 본 순간부터 다리의 존재를 절실히 인식하기 시작했고. 세상을 보는 시각에 한 가지 채도를 더 추가하게 되었으니까. 다리를 내려다본다. 오늘도 나를 이곳까지 오게 한 두 기둥을 바라본다. 세계에 널려있는 구부러진, 펴진, O자형의, 반쪽짜리의, 없는, 다리들을 떠올려 본다. 그리고 그 위에 지탱된 '몸'들을 떠올려본다. 문득 세상에 대한 애정이 피어나는 것 같다.


무수한 다리들이 이 행성을 받치고 있고, 행성이 그 무수한 다리들을 거둬 먹여 살리고 있다. 의자에 앉아 다리에게 잠깐의 휴식을 권하는 내가 뇌 속의 전기 신호로 다리를 인식한다. 그때 내가 보았던 다리는 그러니까 다리이다. 건물 출입구 앞에 선, 하얗고 길쭉하고 초라한 다리 하나. 무언가를 지탱하다 잠시 개구리처럼 고꾸라지고 만, 아름다운 지그재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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