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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급-1

돌려드립니다. 감사했습니다.

by 라면

기다리던 연락이 드디어 왔다.


전 직장에서 온 연락이었다. 2023. 7. 1. 자 의원면직에 따른 복지포인트 조정내역서였다. 공무원은 매년 일정액의 복지포인트를 받는다. 하지만 근무 기간을 일 년 채우지 않고 면직할 경우, 복지포인트를 365로 나누고 근무일수만큼 곱한 금액을 제외한 나머지 금액을 환급해야 한다. 작년 말부터 의원면직을 생각하고 있던 터라, 올해 받은 복지포인트의 딱 절반만큼만 사용하고 나왔다. 하지만, 이 절반이라는 편리한 수식이 적절한 계산이었는지는 확신하지 못했다. 어쩌면 더 많은 금액을 더 환급해야 하는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전 직장으로부터의 연락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 연락이 왔다. 역시 내 계산은 틀렸다. 하지만 오차가 크지는 않았다. 몇천 원 정도만 더 이체하면 나는 이 기다림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었다. 연락을 받자마자 바로 해당 금액을 이체했다. 몇 달 전에는 건강보험 관련하여 환급금을 요청하여, 해당 금액을 또 이체해 준 적이 있다. 복지 포인트까지 깔끔하게 환급 처리했으니. 이젠 정말 더 부담해야 할 환급금이 없을 것이다. 내가 알기론 그렇다. 후련했다.


후련했다.


왜 후련하다고 느꼈나. 나는 후련하다의 사전적 의미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이체가 됨과 동시에 그 단어를 떠올리고 말았다. 내 감정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기 위해 단어의 뜻을 찾아본다.


후련하다 (형용사)

1. 좋지 아니하던 속이 풀리거나 내려서 시원하다.

2. 답답하거나 갑갑하여 언짢던 것이 풀려 마음이 시원하다.


좋지 아니하던 속이 풀린 걸까. 답답하던 것이 풀린 걸까. 둘 다 해당되는 것일지도. 아니면 후자에 가까운 뜻일지도.


뭐가 그렇게 좋지 아니하고, 답답했던 것일까. 겨우 몇만 원, 몇천 원 하는 금액을 가지고 왜 이렇게 신경을 쓰고 있었던 걸까. 전 직장에 대한 기억을 빨리 잊고 싶었던 것뿐일까. 하지만, 전 직장에 대하여 나쁜 기억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분명 그곳에서 값진 경험을 했고, 과분할 정도로 다정한 동료들도 많이 만났다. 흔히 사회 초년생들이 겪는다는 직장 상사로부터의 스트레스도 거의 겪지 않았다.


그렇다면 반대로 그리 나쁘지 않은 경험을 한 그곳을 나는 왜 그만둬야만 했나. 분명 어렵게 들어간 곳이고. 그곳만 들어가면 내 인생에 많은 걱정을 덜어낼 수 있을 거라 믿었는데도.


여러 가지 원인들을 어렵지 않게 떠올린다. 악질적이고 반복적인 민원들. 공직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시기엔 이 민원들 때문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울분이 치솟고, 느껴선 안 될 분노까지 느꼈다. 내가 처음 발령받은 부서는 불법주정차를 관리하는 부서였다. 구청에서 가장 많은 민원을 상대해야 하는 곳이었다. 갓 공직생활을 시작하자마자 온갖 욕설과 비아냥을 견뎌내야 했다. 하지만 이런 스트레스는 생각보다 빨리 익숙해졌다. 몇 달 정도 지나니, 욕설과 함께 고성을 지르는 민원인을 아무렇지 않게 응대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그렇지 않았는지, 약 육 개월 정도 일한 무렵,목과 어깨, 가슴 쪽에서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처음엔 경미한 통증이었다. 날이 갈수록 통증은 몸집을 불려 나갔고, 숨을 쉬기 어려운 호흡 곤란 증세까지 동반했다. 한 달 정도 한의원에 다니면서 여러 치료를 받게 되었다. 그때만큼은 아니지만, 지금도 그 통증은 아직도 조금 남아 있다.


그 후엔 또 다른 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민원인들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내게 '무언가'를 요구하지만. 나는 그 '무언가'를 도저히 이뤄낼 수가 없는 존재라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불법주정차량에 대한 강력한 단속을 원하지만, 누군가는 그 반대를 원한다. 누군가의 편을 들어주면 반대편의 누군가가 악질 민원인이 되어 버린다. 일을 열심히 한다고 해서 없어질 민원들이 도저히 아니었다. 도대체 열심히 일을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정의할 수 없었다. 그렇게 나는 그냥 직장을 출퇴근하는 공무원 A가 되어가고 있었다. 어떤 일에도 성취를 느낄 수 없고, 그저 아무 일 없이 하루가 넘어가기를 기원하는. 부디 다음번 업무분장 때는 조금 더 수월한 업무를 맡을 수 있기를 바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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