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컵들의 시간

컵들에게도 다른 꿈이 있었겠지요

by 라면

혹독한 추위가 한 걸음 물러났다.


아무리 두꺼운 옷을 껴입어도 느껴지던 한기는 떠나 버렸다. 완연한 겨울은 아직이라 속단할 수 없지만, 이번 겨울도 그리 추울 것 같지는 않다. 그럴 때면 스멀스멀 지구온난화로 인한 급격한 환경 변화에 대한 공포가 떠오르곤 한다. 하지만, 그 공포는 오래가지 못한다. 변명하자면. 두려워해 봤자 달라질 것 없으니까. 그저 걱정거리 하나라도 내려놓고 오늘은 즐기는 것이 올바른 삶의 태도가 아닐까. '카르페디엠.' 현재를 즐겨라. 통증을 잊게 하는 아세트아미노펜. 현대인들의 필수품이 되어버린 부작용 적은 진통제 같은 문구. 하지만 누구를 원망할 수 있을까. 미래를 두려워하는 일에 푹 빠진 채 정상적인 삶을 이어갈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나는 그렇게 한 뼘 더 비겁해진다.


참을 만한 추위를 느끼며, 이어폰을 귀에 꽂고 오늘 약속 장소로 가기 위한 최적 경로를 검색해 본다. 정류장까지 도보로 오 분. 버스를 타고 십 분. 약속 장소는 보통 카페이다. 누구와 만나든, 왜 만나든. 언제부턴가 항상 카페에서 약속을 잡곤 했다.


이십 대 초반까지만 해도 카페에 가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맛도 없는 커피를 오천 원 가까운 거금을 들이면서까지 마시려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때는 카페 대신 피시방이 내 삶을 가득 채워 주었다. 주말이면 아침부터 피시방에서 친구들을 만나 열 시간이 넘도록 게임만 했다. 그렇게 게임을 하고 나서도 집에 가면 게임을 더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잠에 들기 위해 누워 있을 땐, 내일 게임을 켜면 무슨 아이템을 사고, 어떤 컨트롤을 해 볼지 시뮬레이션을 돌려 보았다. 그 정도로 게임에 중독되어 있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게임에 대한 애정은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레 식어 가고 있는 중이다. 물론 지금도 게임을 하긴 하지만, 그때처럼 열정적으로 하지는 않는다. 두 시간이 넘어가면 이젠 머리가 아프고 손이 저려서 할 수도 없을뿐더러, 흥미도 그리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다행인 건지, 아닌지 확신할 순 없다. 내 삶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던 것이 사라지면서 그 공백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 아직도 방황하는 중이니까.


방황하는 발걸음은 결국 카페로 향했다. 혼자 카페에 가면 보통 책을 읽거나 글을 쓴다. 게임과 다르게 오랫동안 그러지는 못한다. 한 시간도 그 집중력을 이어가기 힘들다. 사십 분 정도 그러고 시간을 보내다, 웹툰이나 유튜브를 십 분 정도 보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것이 혼자 카페에 갔을 때의 루틴이 되었다. 누군가와 약속이 있어 카페에 갔을 때는 다르다. 그 누군가가 말하기를 좋아하고 잘하는 사람이라면 나는 청자가 되어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 누군가가 말하는 것을 별로 즐기지 않는다면, 나는 간간이 입을 열고 그 사람이 좋아할 만한 화두를 툭툭 던진다. 짧고 얕은 대화가 오가고 다시 침묵이 찾아온다. 어색한 침묵 속,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긴장한 마음을 달래주는 한 잔 차가 되어준다. 닫힌 입술로 상대를 바라보다 보면, 조금은 더 친근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것이 카페라는 장소가 가진 매력이겠지.


약속 장소에 도착한다. 반가운 얼굴들이 나를 맞는다. 각자 원하는 음료를 주문한다.


원형 테이블에 컵들이 모여 앉는다. 생김새도, 안에 품고 있는 내용물도 제각각이다. 그들은 각각 하고 싶은 말을 품고 있다.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어요. 첫 번째 컵이 그렇게 입을 엶으로써 대화가 시작된다. 살다 보면 그런 일은 비일비재하더군요. 두 번째 컵이 뜨거운 카페 라테를 식히며 말한다. 가끔은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요. 아무것도 모른 채 천진난만하게 웃고 놀던 시절로요. 세 번째 컵에 담긴 돌체 라테는 제대로 비우지 않으면 끈적끈적한 흔적을 남기곤 한다. 막상 그 시절로 돌아가면 다시 어른이 되고 싶어질 걸요? 네 번째 컵은 얼죽아 파이다. 폭설이 내리는 한겨울에도 얼음 가득한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마는. 요즘은 그냥 재밌는 일이 없는 것 같아요. 첫 번째 컵은 한쪽으로 상체를 기울이고, 권태에 가득 찬 나른한 목소리로 말한다. 그 안에 든 건 카푸치노다. 정수리, 작고 몽글몽글한 우유 거품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 취미를 좀 찾아보시죠. 네 번째 컵이 말한다. 아무래도 그래야겠죠. 첫 번째 컵은 우유 거품이 묻은 안경알을 닦으며 말한다.


컵들의 시간.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어버린 제각각의 컵들이. 안에 든 내용물을 조금씩 식힌다. 내일도 카페에 들를 것이다. 내일은 다른 음료를 한번 마셔볼까. 아주 낯선 것 말이지. 이를테면 에스프레소와 물과 복숭아와 얼그레이를 섞은 것처럼. 시간이 얼어붙어 컵에 물방울을 맺게 한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문장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