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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급-2

돌려드립니다. 감사했습니다.

by 라면

A가 된 나.

출근하고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챙겨 온 텀블러에 스틱 커피를 타는 것.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켜고, 모니터에 불이 들어오는 것을 멍하니 바라본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업무에 필요한 모든 프로그램을 켜 놓는다. 아홉 시가 되면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한다. 그전까지 약 십 분 정도 여유를 가진다. 아홉 시가 됨과 동시에 걸려오는 전화들. 첫 번째 전화를 받는다. 다행히 상냥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안도의 숨을 내쉬며 필요한 서류들을 안내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수많은 전화들. 어떨 때는 날 선 목소리로, 어떨 때는 한껏 방어적인 목소리로 응대한다. 커피가 바닥을 드러낼 때쯤 자리에서 일어나 냉수를 가득 받는다. 물을 마시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점심시간이 된다.



점심은 보통 혼자 먹는다. 낯을 가려서이기도 하지만. 원체 편식이 심한 터라 남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되도록 혼자 먹는 다. 거기다 점심 한 끼를 먹기 위해 금일만원이라는 돈을 내야 한다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보통 컵라면으로 점심을 때웠다. 혹은 구청 바로 맞은편에 있는 자취방에 들러 어제 저녁에 먹다 남은 배달음식을 데워 먹기도 했다. 점심을 먹고 나면 일찍 사무실에 돌아와 책을 읽는다. 책은 항상 읽으려 했다. 독서라도 하지 않으면 나 자신을 잃을까 두려웠다.



오후 시간. 여러 공문들을 처리하고, 협조 부서에게 연락을 돌리고, 서류들을 작성하다 보면 어느새 퇴근할 시간이 다가온다. 다섯 시가 넘어가는 순간 가슴이 두근댄다. 많은 직장인들이 공감할 수 있는 설렘이리라. 여섯 시가 되고, 자리를 정리하고 퇴근을 한다. 집까지는 걸어서 오 분이면 충분하다. 집에 도착해 짐을 풀면 여섯 시 십 분 정도이다. 저녁은 보통 라면, 혹은 배달 음식이다. 저녁을 먹고 잠시 쉬다 보면 일곱 시 정도가 된다. 그때부터 졸음과의 전쟁이 시작된다. 무언가 하려고 해도 온몸이 무거워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변명이란 것을 안다. 어젯밤에 오늘은 꼭 퇴근하고 무언가를 하자, 마음먹었던 것도 생생히 기억난다. 그러나 이미 내 몸은 침대 위에 뉘어져 있다. 졸음이 결국 이긴다. 눈을 뜨면 아침이다.



체력 문제인 줄 알았다. 운동을 시작해야 하나 고민했다. 산책 같은 간단한 운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체력이 금방 늘리 없었다. 여전히 녹초가 되어 돌아와 잠만 자는 생활이 무의미하게 흘러만 갔다. 직장 밖의 시간을 알차게 쓰지 못할 것 같으면, 직장 안에서의 시간을 소중하게 여기면 되지 않을까. 직장에서 성취감을 느끼고, 업무를 해 나가며 점점 성장해 가는 내 모습을 보려 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하루는 그저 흘러가는 시간일 뿐. 내림과 동시에 녹아 버리는 는개 같았다. 정확히 말하면 이미 그렇게 보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그렇게밖에 보이지 않았던 거겠지만.



그래서 나는 2022년 11월 중순쯤 의원면직 의사를 내비쳤다. 그때 팀장님은 나를 말리셨다. 점심을 사주시며, 퇴사 후에 다른 계획이 있는 거냐고 물으셨다. 계획은 있지만, 확정된 건 없다고 말씀드렸다. 그저, 조금 더 글을 써보고 싶다고. 서른 살까지는 글만 써 보다가, 내게 정말 재능이 없음을 확신하게 되었을 때부터, 다른 일을 찾아볼 생각이라고. 팀장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 생각은 존중하지만, 너무 성급한 결정인 것 같다고. 맞는 말씀이셨다. 나는 흔들렸고, 결국 다음 해에도 어영부영 일을 계속하게 되었다.



A는 그러나 결국은 다시 한번 팀장에게 면직 의사를 내비쳤다. 해가 바뀌면서 팀장은 바뀌어 있었다. 이번 팀장은 그렇게까지 날 붙잡지 않았다. 붙잡으면 더 강하게 의사를 내비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 팀장은 어딜 가서든 잘되길 바란다며, 식사 자리를 마련해 내 앞길을 축복해 주셨다.



면직 당일, 부모님의 도움으로 곧바로 고향으로 내려왔다. 바리바리 싸든 짐을 차 트렁크에 싣고, 고향으로 내려가는 고속도로 안에서. 가슴이 간질간질 설레어 왔다. 내 앞에 놓여있는 길이 그토록 아름다워 보일 수 없었다. 집으로 내려와 당장 글 쓰는 데 몰두했다. 작법서도 여러 권 구매해 읽었다. 아직은 그저 좋기만 했다. 퇴사 후에 필요한 여러 행정 절차들을 거치면서도 그냥 웃음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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