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려드립니다. 감사했습니다.
교육열이 높은 동네의 한 카페에서 면접을 보았다. 원장님은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주셨다. 학원 강사의 장점이나, 고충, 공부해야 할 것들, 그리고 급여나 근무 조건 같은 것들. 덧붙여 어느 정도 공부를 하고 나야 입시 강사로 국어 강의를 시작할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일을 시작하게 된다면, 처음 몇 주 정도 독서 논술 강사 교육을 받을 거라고 했다.
지금은 그때 원장님께서 무슨 말을 한 건지 나름대로 정리해서 적어놓을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원장님이 하는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 아직은 직업을 구해야 한다는 완벽한 확신이 없어서 원장님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던 것 같다. 면접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모니터에 써 놓은 습작들을 띄워 놓았다. 한참 노려 보았다. 하얀 것은 한글 프로그램의 새 문서 포맷이요, 검은 것은 글자이니라. 글자 위에 덧씌워져 있어야 할 마땅한 것들이 어른거리기만 할 뿐, 그 아름다운 얼굴을 장끼처럼 풀숲에 숨긴 채 드러내지 않았다. 원장님께 일을 하고 싶다고 문자 드렸다. 그렇게 학원 강사의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네 달 전에 있었던 일이다.
본격적인 근무 시작 전 몇 주, 교육 기간을 거쳤다. 교육을 마친 후 독서 논술 강사가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아이들은 해맑고, 귀여웠다. 강사라는 일을 망설이던 이유 중 하나인, 아이들을 제대로 관리할 수 있을까에 대한 걱정은 이젠 하지 않는다. 요즈음 아이들이 버릇없고 막무가내라는 정보는 적어도 나에게는 선입견이었다. 물론 개중에는 여러 매체에서 자주 언급되는, 비행청소년이 있겠지. 하지만 그들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했다.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선생(교사는 아니지만)의 마음가짐을 알 것만 같았다. 뭐라도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 하나라도 더 가르쳐 주고 싶은 마음. 그래서 이번 직장은 전 직장보다는 마음에 든다. 출근 준비를 할 때도 더 이상 우울과 분노와 싸우지 않는다. 공직 생활 중 얻었던 원인이 불명확한 목과 어깨 통증도 많이 진정되었다.
독서 논술 강사인 만큼 근무 시간 내 책도 많이 읽게 되었다. 주로 아이들을 위한 동화, 혹은 청소년 소설이었다. 그중에는 초등학교 시절 재밌게 읽었던 책들이 몇 권 있었다. '마당을 나온 암탉' 오래된 고향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운 책이었다. 이 책이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재밌게 읽었던 책이지만 애니메이션을 보지는 않았다. 학원에 다니는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애니메이션으로 알고 있지 책이 있었다는 건 몰랐다고 했다. 책을 추천해 주면 아이들 역시 감명 깊게 읽어냈다.
전 직장보다 이 직업이 나를 좀 더 살아 있게 만드는 이유. 역시 그것은 욕설과 고성의 부재 덕분일까. 도저히 목적을 모를 비아냥을 듣고 나면, 나는 인류에 대한 애정을 잃곤 했다. 그러나 이곳에선 그런 일은 없었다. 아니면 하루하루 성취감을 느껴서일까. 매일 책을 읽으며 소통하며 나 역시 책을 읽는 새로운 시각을 얻어 가고 있다. 아이들이 써 놓은 글을 보면서 동심까지 회복해 가고 있다. 아이들의 말과 글은 어른들의 어두운 모습에 한껏 찌들어 있던 나를 조금씩 정화했다. 그중 어떤 아이가 한 말이 아직 기억에 남는다. 나 역시 초등학교 때 읽은 적 있던 동화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읽고 나눈 대화였다.
"책에 나오는 나무처럼 항상 나를 사랑해 주는 분들은 누가 있을까?"
부모님의 크나큰 사랑에 대해 한번쯤 되새겨 보았으면 해서 한 질문이었다.
"저를 길러 주시는 부모님과. 항상 고생하시는 공무원분들이요."
나는 순간 웃음이 터져 나오려 한 것을 간신히 참았다. 비웃음이 아니라. 정말 그냥 웃음이 나오려 했다. 아이의 짧은 말 하나가 나를 감싸 안고 고생했다고 위로해 줄 줄 전혀 예상치 못했기 때문에 웃음이 난 것이다.
아이들은 순수하다. 어른들은 그렇지 못하지만. 핵심은 어른들은 그러지 '못'한다는 것이다. 순수한 어른들은 도태된다. 어른에게는 어느 정도의 비열함이 필요하다. 비열한 나는 여전히 전 직장과 지금 직장을 천칭의 두 접시에 올려놓고 있다. 아이들의 순수는 이 비겁함을 드러나게 한다. 빛이 그림자를 길게 늘이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