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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크하드 Aug 06. 2024

5년 동안 거짓말을 한 신랑에게 서류 한 장을 내밀다.


2018년 6월 13일 각서내용


앞으로 음주 회식은 한 달에 한 번만 한다.

신용카드는 만들지 않는다.

돈에 대하여 거짓말하지 않는다.

지키지 않을 시 쭈마마는 해외로 가출하겠음


푸파파의 돈사고 때문에 작성한 각서인 줄은 알고 있었으나 5년 전에 적은 각서라는 걸 이번에 알게 됐다.

이래서 사람은 항상 기록하고 살아야 하나 보다 

요 종이조가리 한장 덕(?)에 나는 그대로 해외로 가출하였다.

그것도 초등 3학년 첫째 딸 망아지와 함께!!


사건의 발단은 작년 가을쯤, 푸파파의 비자금 때문이었다.

비자금 단위가 몇십만 원이면 봐주겠는데 몇백 그것도 몇 년을 해 먹은 것이다. ㅠㅠ

지난 5년 동안 매달 10만 원씩 따로 나오는 수당 꿀꺽한 것까진 애교로 봐주겠는데 1년 단위로 5번 나온 연차비 매년 100만 원가량 홀라당 써 버린 것이다. 놀라운 건 그 돈을 모두 본인 취미생활 게임기, 레고 등등 모두 탕진한 것.(백만원이 있으면 백만원 다 쓰고 십만원이 있으면 십만원을 다 쓰는 푸파파의 하루살이 소비습관)

작년 직장 5년 차가 되면서 회사에서 나온 포상금 100만원을 내가 알게 되면서 줄줄이 사탕처럼 5년 동안의 비자금 출처와 사용내역이 까발려진 것.


여태 가장의 무게에 짐이 될까 봐 돈 더 벌어오라라는 소리 없이 생활비 주는 대로 알뜰살뜰 매달 가계살림 펑크 난 적 없이 살아왔는데 그간 5년 동안의 거짓말이 들통이 나면서 나도 눈에 쌍심지를 켜고 대차게 싸웠다.


그래서 포상금으로 나온 100만원은 어떻게 된 거야?
 지금이라도 보내 줘!!
설마 다 쓴 건 아니겠지?

카드값 내고 하니깐 다 써버렸지!!

포상금 얘기 듣고 첫째 방 책상이랑 침대
 꾸며 주려고 했는데 다 써버린 거야?

5년 동안 내가 열심히 일 다녀서 보너스 조로 받은 거지~~
그건 내 돈인데 다 쓴 거 같고 왜 뭐라고 그래?

내가 이번 일 몰랐으면
앞으로도 계속 연차비나 수당 다 속였겠네.
5년 전에 각서 쓴 거 기억 안 나?

뭔 각서?


위에 각서를 들이밀고 보여줬더니 자기도 할 말이 없나 보다. 나도 이제는 냉전상태.

5년 전에 용돈카드 겸 신용카드 만들어서 생각 없이 쓰다가 매달 용돈이 신카 결재금액에 한참 모자라자

몇백 들어있는 청약통장 본인명의로 되어있는 것을 내게 말없이 해지해서 카드대금을 막은 것이다.


자기는 자기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사는 거 같은데
나도 내가 번 돈으로 내가 하고 싶은 거 하고 살게.
마지막 조항 보이지?!
지키지 않을 시 쭈마마는 해외로 가출하겠음!!

나는 쇼핑에도 그렇게 관심도 없고 취미생활도 가끔 친구들이랑 술 한잔 하며 스트레스 푸는 정도.

한창 살 빼기 위해 다이어트에 매진할 때도 주민센터 헬스, 동네 운동장 조깅으로 애 둘 낳은 후 5kg 감량했다.

푸파파는 PT랑 헬스 한다고 헬스장에 70만 원 바쳤는데 PT 횟수 7번만 채우고 1년 헬스는 두 달 정도 다니고 흐지부지. 몇백짜리 자전거 타고 몇십짜리 게임기, 레고 등등 아주 취미생활에 천만 원은 넘게 바친 것 같다.

한 번은 신랑이 생일날이나 결혼기념일날 뭐 갖고 싶은 거 액세서리나 가방 이런 거 필요한 거 없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그때 나는 그런 거 필요 없고 몇 년에 한 번씩 저렴한 동남아라도 가고 싶다고 물건에는 욕심 없다 말할 정도로 미니멀리스트를 지향하지만 유일하게 해외여행에 목말라 있었다.

코로나에 아이들 키우느라 시간 여건도 안돼서 사실 가장 큰 건 경제적인 여유가 없어서였다.

하지만 나만 아끼면 무얼 하나 나도 재택근무로 소액이지만 돈도 벌고 있고 푸파파가 너무 괘씸하단 생각에 홧김에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나도 내가 하고 싶은 해외여행 하고 비행기 타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던 첫째를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은 것.


다음 날 아이들 여권을 갱신하러 구청에 갔고 돌아오는 길에 여행사를 방문해 11월에 떠나면 좋은 동남아 나라를 문의했고 치안을 생각해 태국을 명 받았다.

일주일 후 여권이 나왔고 가격을 생각해 온라인여행사로 태국 패키지여행 폭풍 검색.

최저가에 날짜 이 정도면 됐다 싶어 다음날 바로 예약 진행. 


예약 버튼 누르기 전에 친정엄마에게 전화했다.

반에서 비행기 안 탄 친구가 없고 해외 가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는 첫째를 데리고 동남아 3박 5일 동안 갈 생각인데 둘째를 봐줄 수 없겠냐고 여쭤봤다.(만약 안 된다고 하시면 둘째도 데리고 갈 각오였다.)

사실은 푸파파가 돈 사고 쳐서 해외로 튄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엄마 속만 상하지 싶어 그 얘기는 생략했다. 

친정엄마의 승낙이 떨어졌고 과감히 예약버튼을 누르고 돈 생각 안 하기로 하고 신용카드로 시원하게 긁었다.

나만 아끼면 뭐 하나? 나도 내 딸 원하는 거 해주고 싶었다.

이 모든 게 3일 만에 다 이뤄진 거라면 믿어지실까나?

그리고 10일 후에 떠난다는 게 실화?

그렇게 가고 싶다 갈까 말까 고민을 몇 달 몇 년을 했는데 화딱지가 나니 모든 게 2주 만에 속전속결!!




다음날 금요일 아침 첫째에게 선생님께 현장학습신청서를 받아오라고 지시했다.

호기심 대마왕 첫째는 “왜?”라고 물었고 나는 “첫째랑 데이트하려고”

하교 후 받아온 현장학습신청서에 


일  시 : 2023.11.5. - 2023.11.10. 

장  소 : 태  국 (방콕 파타야)


라고 적고 바로 금요일저녁 전해주고 싶었지만

다년간 배워온 망아지사용설명서를 참고하여

설레발쳐서 미리 말하면 10일 내내 나를 괴롭힐 아이란 걸 알기에 주말이라도 편히 있자 싶어 삼일을 참음.


그리고 드디어 월요일. 아침부터 월요병 도진 첫째에게 오늘 학교 갔다 오면 큰 선물이 있다고 밑밥을 깔고 학교를 보냈고 작성한 현장학습신청서를 편지봉투에 넣어 우리 집 우편함에 넣었다. 

하교하자마자 가방 집어던지고 선물 어딨어?라고 외치는 첫째.

1층 로비 우편함에 있다 말하자 문도 안 닫고 한달음에 달려간 망아지!

나는 핸드폰 카메라를 켜고 거실에서 기다렸다. 찐레알반응을 실시간으로 담고 싶어서~~~~

복도에 들리는 우당탕탕!!! 망아지 발걸음소리 그리고 씩 웃으며 들어오는 첫째의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핸드폰 카메라에 다 담았다. 그다음부터는 내 생각대로 나오는 첫째의 반응.


엄마. 짐은 언제 싸?
:
오늘 안 싸?

첫째야. 짐은 3일 전에 싸면 돼.
미리 싸면 오히려 더 힘들어”


혼자 싸지 마!
나 학교 갔다 오고 같이 싸!!
:
오늘 싸자!! 그냥


짐 문제로 3일은 괴롭혀~~~

거기는 날씨가 어때? 나 뭐 입고 가? 얼마 가져갈 거야? 거기는 무슨 돈 쓴대?

돈 문제로 3일 괴롭혀~~~

나 거기서 뭐 사도 돼? 얼마 줄 거야? 나한테 그냥 얼마 주면 안 돼?

한 번은 다 싼 캐리어를 열어달라고 뭐 쌌는지 내 눈으로 봐야 한다면서 여행 이틀 전에 또 다 풀어 봐~~

만약 몇 달 전에 예약했으면 몇 달을 날 괴롭힐 아이다.


그리고 출발 3일 전 푸파파에게 비행기표를 보여줬다.


드디어 디데이!!

디데이까지 집안을 싹 다 정리하고 가야 하는 K아줌마의 숙명!!

밥통은 다 비웠는지 음식물 쓰레기는 다 버렸는지 귀중품은 잘 숨겼는지 빨래는 다 했는지

5일 동안 집비움에 철저히 대비 후 그렇게 한 손에는 캐리어 하나 끌고 또 다른 손에는 첫째 손을 잡고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난 애 데리고 간다. 알아서 해라. 혼자서 잘 먹고 잘 살아라.

시원하게 날려주고 그렇게 초등 딸아이와 단 둘만의 해외여행이 시작됐다.

( 엄마랑 둘이 가는 10살 딸아이의 첫 해외여행기는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




< 에 필 로 그 >


3박 5일 태국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 와서 각서를 업데이트 했다.

조항은 똑같고 

지키지 않을 시 쭈마마는 해외로 가출하겠음.

을 지우고

지키지 않을 시 쭈마마는 "크루즈 여행"을 갔다오겠음.

내가 못할 것 같으냐? 

그때는 친정엄마 모시고 단 둘이 크루즈 여행 갔다 온다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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