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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업주부 1일차의 요리정복기 Part.1

Ep5. 아이들을 위한 요리초보의 첫 요리를 찾아라!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미래에 대한 대책 없이 일을 놓은 것처럼 

이번에도 며칠간의 휴식 끝에 호기롭게 전업주부의 길을 선언하게 되었다.

사실, 한량 같은 생활을 조금 더 즐긴다는 것은 또 다른 가정불화의 씨앗을 잉태하는 것과 같았다.

길게 설명을 늘어놓을 필요도 없이 

세상의 어떤 아내도 집에서 놀기만 하는 남편을 좋아해 줄 순 없을 것이다.

부모님에게는 '내일부터 오실 필요 없다'라고 칼날 같은 구조조정을 집행하는 사람처럼 말했고

아내에게는 '내일부터 내가 알아서 한다'라고 무사 같은 비장함으로 출정하는 사람처럼 말했다.

이렇듯, 겉으로는 제법 당당해 보이기까지 했던 '주부 선언'이지만, 진실되게 정리한다면 

'애인에게 차이기 전에 먼저 찬 상황이랄까?'

어쩌면, 경제적 무능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살림살이의 길로 걸어들어간 것일지도 모른다.

뭐라도 할 수밖에 없는 운명 같은 끌림. 

제 발로 부엌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혼나고 기어들어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의한 결정.

여하튼, 아내처럼 밖에 나가 돈을 벌기 싫으면 집에서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당연하다.

영광이라고 할 것도 없지만 왕년의 추억에 빠져 겉돌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오늘 자고, 내일 눈을 뜨면 나는 전업주부다.


거창할 것도 없고, 준비랄 것도 없는데 심장이 왠지 기분 좋게 두근거린다.

어떤 일이건, 첫날의 의욕은 늘 혈기가 왕성하고, 자신감으로 가득 찬 스스로를 만나게 된다.

공부도 내일부터 열심히 하기로 마음먹으면 

오늘 일찍 자고 빨리 내일이 오기를 기도하게 된다.

다이어트도 내일부터 열심히 하기로 마음먹으면

오늘 많이 먹고 빨리 내일이 오기를 기도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초심의 매력이다.


"집안일 별거 없다. 밥은 밥솥이 하고, 빨래는 세탁기가 할 뿐이다."라는 

못된 시어머니의 꼬장 같은 이야기가 주부생활 1일차를 맞이하는 나에겐 힘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이런 논리라면 청소 역시 청소기가 하는 것이겠지만, 청소만큼은 가족에게 보여줄 비장의 무기가 있었다.

군대에서의 경험을 살려 치약을 섞은 물로 걸레를 빨아 열심히 바닥을 문지르는 것이다.

온 집안을 치약의 상쾌한 향기로 가득 채우겠다는 상상만으로도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그러나

그 시절 추억을 꺼내는 것 자체가 그동안 얼마나 청소를 안 하고 살았는지 말해주는 것 같아 씁쓸했다.

생각해 보면 군 생활 이후 청소를 한 기억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사무실 책상과 바닥은 가끔 정리했던 것 같았지만 이제 와서 아무런 의미도 없다.

가족이라는 공동체보다는 하고 싶은 대로만 살아온 것에 잠시 반성을 하게 되었다.

여하튼, 특별한 비법과는 상관없이 집을 깨끗하게 만드는 것에는 초보가 없다. 

몸을 움직일 힘만 있다면 누구든 반질반질하게 청소하는 것이 가능하다.


정작 초보 주부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는 요리에 있었다.

코앞에 닥친 막중한 상황 앞에서 진지했던 고민들을 늘어놓자면 

'내일 아침은 뭘 먹을까?', '내일 점심은?', '내일 저녁은?' 

'나가서 먹을까?', '사 올까?', '시킬까?', '일단, 내일 아침은 뭘 먹을까?', '내일 점심은?', '내일 저녁은?'...

끝없는 무한 루프를 간신히 끊어내고 냉정하게 스스로를 평가해 보았다.


요리 가능한 메뉴는 밥, 라면, 볶음밥만 자신이 있었고, 반찬은 냉장고의 터줏대감 김치가 전부였다.

달걀 프라이 정도는 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냉정히 말하면 그것도 할 수 없다.

달걀 프라이의 성공 여부는 달걀을 깨트리는 순간 작은 껍질이 같이 들어가는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 뒤집기에서 승패가 결정된다. 

뒤집는 타이밍을 잡기 어려워서 프라이팬과 맞닿은 면만 타들어가거나, 웍질이 서툴러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

뒤집기에 성공해도 노른자의 깊은 속까지 완전히 익기를 기다리면 흰 자가 먼저 갈색빛으로 변해버린다.

불안한 마음에 볼록한 가운데 부분을 살짝 누르면, 노른자가 용암이 흐르듯 걸쭉한 페인트처럼 

이미 짙은 갈색이 된 흰자 사이로 콧물처럼 질질 흘러내린다. 

원했던 그림은 동그란 노른자가 쌍화차 위에 떠 있는 것 같은 완벽한 구(球)의 형태였는데 

현실은 커피 얼룩이 묻은 하얀 옷처럼 참으로 먹음직스럽지 못한 형태가 되어버린다.

결국, 참지 못하고 냅다 휘저어버리면 프라이가 아닌 스크램블의 모습으로 완성된다.

따라서,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달걀 프라이가 가능한 것이 아니라 달걀 스크램블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긍정적인 마음으로 바라본다면 당장은 최악의 참사를 피할 수 있는 상황이기도 했다.

오늘까지 요리 담당은 어머니였고, 냉장고 가득 남겨놓은 찬란한 유산들이 있었다.

다만, '그 요리를 아이들이 얼마나 먹고 싶어 하는가?'에 대한 물음표로 인해 선뜻 손이 가지 않을 뿐이었다.

우리 집엔 '요리의 질'이 아닌 '요리의 양'에 관한 해묵은 문제가 있었다.

예를 들어, 미역국을 끓이면 온 가족이 3일 정도는 먹을 수 있는 양을 준비하신다.

세 번 정도 식탁에 올라올 경우, 아이들이 조심스럽게 다른 것을 먹고 싶다고 하면 카레밥으로 넘어가는데 

밥 옆에 미역국이 메인이 아닌 서브로 계속 나온다. 물론, 카레 역시 그 양이 한솥이다. 

누구 먹으라고 이렇게 많이 했냐고 아이들을 대변하는 척 내 생각을 잔뜩 반영하여 투정을 부리면 

양념 불고기로 등급이 올라가지만 역시나 미역국은 밥 옆에서 2인자의 자리를 굳건하게 지키고 있다.

그리고, 흰밥이 먹기에 심심하다고 생각되면 언제든 카레를 위에 얹어줄 수 있다며 

말만 하면 언제든 냉장고에서 튀어나와 밥상으로 출전할 준비가 되어있음을 알려주신다.

이런 상황의 반복으로 냉장고는 새로운 메뉴가 아닌 여러 번 맛을 본 질린 음식들로 가득 차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냉장고가 더 컸으면 좋겠다'라는 어머니의 볼멘 이야기가 나왔을 때는

불현듯 한 문장이 스치고 지나갔다.

'나라에 돈이 없는 것이 아니라 나라에 도둑놈이 많은 것이다'라고 누군가가 말했던가?

정말이지 '냉장고가 작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냉장고를 가득 채우는 것이 문제다'라고 말하고 싶었다. 

나쁘게 말하면, 지금 남아있는 음식들은 '어머니의 유산'이 아니라 '어머니의 잔재'였고

내일 전업주부로 새 출발하는 나로서는 첫 요리로 재활용을 택한다는 것이야말로 

도저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당장 내일 아침에 무엇을 준비해야 하나?'


아침을 먹지 않고 출근하는 아내는 그냥 패스한다고 쳐도, 사랑하는 아이들은 다른 문제였다.

자신 있는 볶음밥을 먼저 선보이고 점심까지 시간을 벌어볼까도 생각했지만 그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명색이 새로운 시작인데 한 마디로 재미가 없다. 

노래방을 갈 때마다 같은 노래를 부르면 어느 순간부터는 상대도 듣지 않고 딴짓을 하게 마련이다. 

게다가 나는 갑작스러운 주부 선언이라 할지라도 강력한 컨벤션 효과를 원하고 있었다.

가정을 돌보지 않던 아빠에서 가정에 충실한 아빠로 변신할 절호의 기회를 놓치기 싫었다.

그렇지만 냉장고 문을 수십 번 열어보고, 인터넷과 유튜브를 폭풍 검색을 해 보아도 

딱히 괜찮아 보이는 요리를 찾을 수 없었다. 

성과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비교적 만만한 요리는 몇 가지 정도 찾을 수 있었다.

'초 간단 요리', '자취생 간편 요리'등으로 검색을 하면 정말 5분 안에 뚝딱 완성될 것 같은 

보기에는 쉬운 난이도의 요리들이 있었다. 

그러나, 솔직한 표현으로 너무 저렴해 보이고, 아내의 눈치가 보일 정도로 건강하지가 못했다.


그렇다. 주제 파악이 먼저다. 나란 놈은 실력도 없는 게 눈만 높다. 못났다.


'남들은 도대체 뭘 해 먹고사는 건가?'를 생각하는 순간 갑자기 입이 옆으로 길어지며 웃음을 머금었다.

남들보다 더 체계적이고 완벽한 표절 대상을 바로 옆에 두고도 외면하고 있었다.

부엌을 이리저리 거닐다 완벽한 치트키를 냉장고 옆면에서 발견했다.

그것은 아이들아 다니는 학교의 급식 식단 표였다.

영양사 선생님의 부단한 노력의 산물이자 아이들의 성장에 필요한 모든 것이 들어있는 집약체였다.

이대로면 한 달 내내 다양하고 균형 잡힌 식사를 준비할 수 있을 것 같이 들뜬 기분이 용솟음쳤다.

그러나 그 기쁨은 약 3초 정도였다.

식단 표를 바라보는 2초 동안은 요리의 비법을 얻은 듯 행복했지만 

남은 1초 동안은 내가 만들 수 있는 요리가 전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조금씩 표정이 일그러질 뿐이었다.

밥과 국 이외에 기본적으로 세 가지 반찬이 들어가야 하는 급식판의 구성을 보았을 때 

지금의 요리 실력으로는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빈자리로 남을 것 같은 좌절감에 휩싸였다.


그 순간

'유레카'까지는 아니었지만 작은 아이디어 하나가 떠올랐다. 

이것은 아주 근본적인 해결책이자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용기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 동안은 초 집중의 상태로 전전긍긍하며 '어떤 요리를 준비할 것인가?'에만 매달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로 인해 더욱 기본적인 명제를 놓치고 있었고, 그것을 깨달은 순간 다시 올라가는 자신감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놓치고 있었다는 그 명제는 바로 

'어떤 요리를 준비할 것인가?'가 아닌, '어떻게 요리를 준비할 것인가?'였다.

What이 아닌 How에 대한 생각을 하며 요리에 대한 기본 방향을 설정하는 것이 더 중요함을 깨우쳤다.


어차피 지금의 실력으로는 저 급식판을 채우지 못한다.  

그렇다면 채우지 않으면 된다. 

어설프게 반찬을 만들다가 외면을 당한다면 엄청난 음식 낭비와 시간 낭비를 초래할 것이다.

이제부터 요리의 기본 방향을 설정한다.

어떤 요리를 하건 나는 일체형으로 간다.

그나마 내세울 만한 요리인 볶음밥처럼 접시 하나로 해결한다. 물론, 반찬은 없다. 

작은 부분이지만 설거지의 편안함도 있다.


'어떻게'를 설정하고 나니 '무엇을'이라는 막막함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고 

다양한 한 접시 요리들이 떠올랐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규동'이었다. 밥 위에 고기와 양파가 진을 치고 있는 덮밥의 형태는 

맛과 영양도 괜찮은 완벽한 한 접시 요리였다.

아직은 실력이 부족하기에 다른 메뉴를 찾아야겠지만 여기서 다시 한번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방송일을 하다 보면 해외 촬영을 갈 일이 제법 많이 생기는데 

끼니 해결은 촬영만큼이나 스트레스로 다가오는 경우가 많다. 

여유롭지 않은 출장비 안에서 입에 맞는 음식을 고르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과제였다. 

그렇다고 매번 패스트푸드점이나 한국 식당을 찾을 수는 없다. 

많은 해외 촬영을 경험한 후에 내가 내린 결론은 

어느 곳이건 일본 음식과 이탈리아 음식은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해외 어디를 가도 비슷비슷한 맛을 느낄 수 있는, 웬만해선 실패가 없는 안전한 선택이 되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이탈리아 음식은 언감생심이고, 일본 요리로 승부를 보기로 했다.

맵지 않기에 아이들에게 적합하고 

아빠의 요리는 남들과 다르다는 개성 있는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으며 

새로운 요리에 도전한다는 즐거움과 호기심이 마음속의 열정에 불을 지핀다. 

내가 만드는 된장찌개나 순두부는 그 누구의 요리보다 맛이 없을 것이 뻔하다. 

좋은 평가라고 해 봐야 '생각보다 괜찮네' 정도일 것이다.  

한 마디로 블루오션으로 승부를 보는 전략이다.


이제 주사위를 던진다.

진정으로 폭풍 검색이 시작되었다. 기본적으로 하루에 세 가지를 준비해야 한다.

위에서 언급한 규동도 며칠 안에는 식탁으로 내놓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되는데 까지는 혼자 힘으로 버틴다는 마음가짐으로 '간단 일본요리', '간단 일본 가정식'등을 검색해 나갔다.


여러 가지 메뉴를 선별하는 과정에서 

정말 간단하고 최고의 요리를 찾을 수 있었다.

요즘도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은 꼭 먹고 있으며, 영양도 괜찮고, 손님들에게 내놓아도 

단 한 번의 실패도 없었던 요리.

평생에 잊을 수 없는 요리를 나는 일본의 가정식에서 찾아냈다. 

그것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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