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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형 Mar 29. 2024

내 삶의 고요와 적막을 찾아서

<장수산Ⅰ>

제가 좋아하는 게임이 있습니다. ‘언리얼월드(Unreal World, URW)’인데, 아래 설명은 위키를 참조했습니다.     



URW는 옛날 철기시대 핀란드를 무대로 사나운 짐승, 혹독한 자연 환경들을 극복하며 말 그대로 야생에서 살아 남는 것을 핵심 컨텐츠로 제공하고 있다. 캐릭터는 수렵, 낚시, 요리, 건축, 농경, 가죽세공과 같은 매우 생활 밀착형 기술을 사용할 수 있으며, 그러한 기술을 연마 및 활용하여 도구를 만들고 건축을 하며 생존해 나가게 되는데, 어느 정도 생존에 익숙해진 이후에는 드넓은 고대 핀란드를 탐험할 수도 있고, 한 자리에 정착할 수도 있으며 각 문화권별로 세세히 나누어진 주민 NPC들과 교류하거나 적대적인 NPC들과 전투를 펼치는 등 오픈월드에 가까운 자유로운 플레이를 즐길 수 있다.          




한국에 이 게임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영어인데다, 50MB도 안 되는 옛날 게임이라 그래픽도 투박하거든요. 게다가 진입장벽은 높고, 불친절하고 어렵기까지 합니다. 할 이유가 없지요.     


하지만 전 이 게임을 좋아합니다.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생각날 땐 컴퓨터를 켜곤 합니다. 이 투박한 게임이 주는 매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게 뭘까요? 아마도 ‘몰입’과 ‘평안’인 것 같습니다. 게임을 하다 보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나무를 베어 나만의 집을 짓고, 호수에서 낚시를 하고, 활을 들어 사슴을 쫓고, 무두질을 통해 옷을 만들고... 한적한 자연 속에서 조용히 살아가는 일련의 과정이 저에겐 와닿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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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목정정(伐木丁丁)이랬거니 아람드리 큰 솔이 베어짐 직도 하이 골이 울어 메아리 소리 쩌르렁 돌아옴 직도 하이 다람쥐도 좇지 않고 멧새도 울지 않아 깊은 산 고요가 차라리 뼈를 저리우는데 눈과 밤이 종이보다 희고녀! 달도 보름을 기다려 흰 뜻은 한밤 이 골을 걸음이랸다? 윗절 중이 여섯 판에 여섯 번 지고 웃고 올라간 뒤 조찰히 늙은 사나이의 남긴 내음새를 줍는다? 시름은 바람도 일지 않는 고요에 심히 흔들리우노니 오오 견디랸다 차고 올연(兀然)히 슬픔도 꿈도 없이 장수산(長壽山) 속 겨울 한밤내 ─ 

                                                                                                     - 정지용, 「장수산 1」          



이해가 쉽지 않은 시입니다. 행도 나뉘어 있지 않고, 마침표도 없는 데다 낯선 말도 많으니까요. URW처럼 난해하지요. 하지만 좋은 시입니다. 찬찬히 살펴보죠. 


머릿속에 풍경을 떠올려봅니다. 거대한 산은 아름드리 소나무들로 빼곡합니다. 만약 나무들이 베어진다면 골짜기엔 메아리 소리가 쩌렁쩌렁 울릴 듯합니다. (벌목정정은 나무 베는 소리를, “-하이”는 “-하구나”를 뜻합니다.) 실제로 나무가 베어졌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만큼 산과 나무가 크고 울창하다는 뜻이지요.  


다람쥐도 쫓지 않고, 멧새도 울지 않는 밤의 산은 깊고 고요합니다. 어둠 속에 빛나는 건 흰 보름달과 산을 덮은 새하얀 눈입니다. 고요와 적막. 이 시의 핵심입니다.    

  

시적 화자는 절에서 내려오신 스님과 바둑을 두었습니다. 여섯 판을 두었고, 여섯 판 모두 스님이 졌지요. 스님은 “허허” 웃으면서 조찰히(조용하고 단정히) 산으로 오릅니다. 승부에 대한 집착도, 속세에 대한 욕망도 없습니다. 화자 역시 스님을 따라 산으로 오릅니다. ‘늙은 사나이가 남긴 냄새를 줍는다’라는 표현이 인상적이지요.     


고요한 산과 달리 화자의 마음은 시름으로 가득합니다. 그 이유가 명시적으로 드러나진 않습니다.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 현실 때문일 수도 있고, 혹은 개인적 사정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화자는 견디기로 합니다. 올연히(홀로 우뚝) 눈 속에 버티고 선 장수산 나무처럼요. 실제로 작가 정지용은 일제말 암흑의 삼 년을 침묵과 은둔으로 보냈습니다. 고결한 삶의 자세가 엿보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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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되니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집니다. 돈, 건강, 일, 미래, 가족 등 신경 쓸 게 많습니다. 거기엔 집착과 번뇌가 있고, 후회와 아쉬움도 있습니다. 그럴 땐 국어책을 펼쳐 이 시를 찬찬히 읽습니다. ‘장수산 속 겨울 한밤내’처럼 마음이 고요한 평정에 이르는 듯 합니다.     


참고로 장수산은 황해도 재령군에 있는 명산(名山)인데요. 임진왜란 때 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피난 와서 살아남았기에 장수산으로 불렸답니다. 이 시의 후속인 「장수산II」역시 마음 편안해집니다. 한 구절 소개합니다. 


꿩이 긔고 곰이 밟은 자옥에 나의 발도 노히노니 물소리 귀또리처럼 즉즉(喞喞)하논다 

(꿩이 기고 곰이 밟은 자국에 나의 발도 놓이나니 물소리가 귀뚜라미처럼 쓰르르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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