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라고 나는 대답했다. “날 수 있으니까요. 아닙니다. 날 수 있는 것으로서 동시에 내 손에 붙잡힐 수 있는 것이니까요. 날 수 있는 것으로서 손안에 잡아본 것이 있으세요?”
“가만 계셔 보세요.” 그는 안경 속에서 나를 멀거니 바라보며 잠시 동안 표정을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말했다. “없어요. 나도 파리밖에는……”
<서울, 1964년 겨울>은 낯선 이와의 만남을 그린 작품입니다. 세 사람이 만난 건 허름한 술집이었습니다. 서적 외판원인 서른댓 살의 사내. 25세 대학원생 안 씨. 역시 25세 구청에서 일하는 나. 각자의 자기소개가 끝나자 대화도 끊깁니다.
그런데 잠시 후에 그가 말했다.
“난 지금 생각해 봤는데, 김 형의 그 오르내림도 역시 꿈틀거림의 일종이라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그렇죠?” 나는 즐거워졌다. “그것은 틀림없는 꿈틀거림입니다. 난 여자의 아랫배를 가장 사랑합니다. 안 형은 어떤 꿈틀거림을 사랑합니까?”
“어떤 꿈틀거림이 아닙니다. 그냥 꿈틀거리는 거죠. 그냥 말입니다. 예를 들면 ……데모도 …….”
“데모가? 데모를? 그러니까 데모…….”
“서울은 모든 욕망의 집결지입니다. 아시겠습니까?”
“모르겠습니다.”라고 나는 할 수 있는 한 깨끗한 음성을 지어서 대답했다.
뭔가 대화답지 않지요? 공통된 화제도 없고, 이야기는 이어졌다 끊어졌다를 반복합니다. 셋은 술집을 나와 거리를 배회합니다. 그때 사내가 말합니다. “제가 함께 가도 괜찮을까요? 제게 돈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는 나와 안을 중국집에 데려가 비싼 음식을 시키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말하지요. “나는 지금 병원에서 오는 길입니다. 내 아내는 죽었습니다. 나는 아내의 시체를 팔았습니다.” 그는 아내를 해부용으로 판 돈 4000원을 같이 써버리자며 애원하다시피 말합니다. 그러다가 저녁을 먹고 남은 돈은 불에 던져버리기까지 합니다.
저라면 불편했을 겁니다. 핑계를 대서라도 그 자리를 벗어나려 했을 겁니다. 작품 속 나와 안 역시 마찬가지였지요. 하지만 아저씨는 혼자 있기 무섭다며 어린애처럼 징징댑니다. 통금시간이 다 되었기에 셋은 여인숙으로 갑니다. 한 방을 쓰자는 아저씨의 애원을 무시하고,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지요.
“그 양반 역시 죽어 버렸습니다.” 안이 내 귀에 입을 대고 그렇게 속삭였다.
“예?” 나는 잠이 깨끗이 깨어버렸다.
“방금 그 방에 들어가 보았는데 역시 죽어 버렸습니다.”
“역시 ……” 나는 말했다. “사람들이 알고 있습니까?”
“아직까진 아무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우선 빨리 도망해 버리는 게 시끄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사실이지요?”
“물론 그렇겠죠.”
다음 날 나는 안이 전해주는 아저씨의 죽음 소식을 듣고 잠이 확 깼다. “난 그가 죽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라는 안의 말에 나는 짐작도 못했다며 서둘러 여관을 나옵니다. 나는 안과 헤어지며 버스에 오릅니다. 안은 눈을 맞으며 무언지 곰곰 생각하고 있었지요. 작품은 이렇게 끝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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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은 시험에도 많이 나온 유명한 작품입니다. 학창시절에 작품의 주제를 ‘현대 사회와 인간 소외’라고 배웠던 기억이 납니다.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되는 시기에 인간적 유대는 사라지고, 관계가 단절된 현대 사회의 모습이라고요.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반쪽짜리 설명입니다. 이 작품을 알려면 그 시대 상황을 이해해야 하지요. 1964년 6월 3일에 큰 시위가 있었습니다. 이른바 6.3 항쟁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 발전을 위한 재원 마련을 위해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하여 자금을 충당하려 합니다. 이에 대학생과 시민들은 대규모 반대 시위를 벌입니다. 1만여 명의 대학생과 시민들이 참여했지만, 정부는 군대를 투입하고 계엄령을 선포하며 진압했지요. 그리고 다음해인 1965년 6월에 한 · 일 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집니다.
6.3 항쟁에 대한 셋의 관심사는 다릅니다. 구청에서 일하던 나는 이 사건을 잘 알았겠지요. 하지만 신분상 참여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반면에 대학원생인 안은 여기에 참여했거나, 적어도 큰 관심을 가졌을 겁니다. (“여관엘 찾아든다는 프로가 내게는 최고죠.”라는 작품 속 그의 말을 통해 유추할 수 있습니다.) 서적 외판원인 사내는 6.3 항쟁에 관심 없었을 겁니다. 먹고 살고 바빴기에 항쟁에 참여한다는 건 상상조차 못했겠지요.
게다가 당시엔 6.3항쟁을 대화 주제로 올릴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만약 신고라도 당하면 끌려가 조사를 받고, 모진 고문을 당할 수도 있으니까요. “데모도...”, “데모를...”처럼 말줄임표가 반복되는 건 이 때문이지요. 이런 점을 고려하면 ‘표현의 자유가 없는 시대’의 ‘무기력한 사람들의 삭막한 내면’을 그린 셈입니다. 작품의 진정한 주제이지요.
어른이 되어 생각해 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정치를 비판하고, 정치인을 욕합니다. 하지만 저는 비난과 비판이야말로 한국 사회를 가장 역동적으로 만든다고 봅니다. 우리나라 국민들은 두 대통령을 도중에 그만두게 만들었고(하야 1명, 탄핵 1명), 전직 대통령들을 감옥에 보냈으며, 집권당 역시 몇 차례 교체된 적 있지요. 독재와 쿠데타가 없진 않았지만, 그게 일평생 지속되지도 않았습니다. 반면에 우리 주변국들은 어떨까요? 정적을 제거하며 실질적으로 종신 집권 중인 러시아, 권력 교체 전통을 깨고 12년째 집권 중인 중국, 3대째 세습 중인 북한, 2차 세계대전 이후로 자민당 일당 집권 중인 일본이 보입니다. 이곳들은 조용해서 좋을까요? 글쎄요. 가장 무서운 건 비난과 비판도 없이 ‘침묵하는 사회’일 것입니다.
선거철입니다. 이런저런 말이 많아 시끄럽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말 많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용함의 다른 말은 ‘무기력함’이고, 시끄러움의 다른 말은 ‘살아있음’이니까요. 많은 사람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투표장에 나섰으면 합니다. 욕하면서도 투표했으면 합니다. 1964년과 같은 무기력함의 시대가 반복되어서는 안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