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물 있사옵니다>
“저 사람 인상이 너무 바뀐 것 같지 않아?”
어느 날 아내가 묻습니다. TV에 나온 그 사람을 보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존경받던 기업인은 어느 날 정치판에 뛰어들었습니다. 국회의원을 하고, 대통령 후보까지 되었지요. 하지만 바뀐 건 그의 직업뿐만이 아닙니다.
토론회에 나온 그의 표정은 인상적이었습니다. 예전의 푸근했던 인상은 사라지고, 눈매는 날카로워졌습니다. 입술은 화가 난 것처럼 꽉 다물었지요. 볼은 심술과 아집이 가득 찬 것처럼 잔뜩 부풀어 있었습니다. ‘저렇게까지 변할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얼굴은 마음의 거울이라는데, 그 마음이 어떤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생각해보니 변한 사람이 그뿐이겠습니까? 세월이 흘러 주위를 보니 오히려 변하지 않는 사람을 찾기 어렵습니다. 태도가 바뀌고, 가치관이 변하고, 신념이 뒤집히지요. 살아온 날을 보면 살아갈 날을 알 수 있다던데, 경험상 꼭 그렇진 않았습니다. 오히려 ‘한결같음’을 유지하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지요. 사람이 바뀌는 것을 보면서 한 작품이 떠올랐습니다.
배영민 : 김군! 담배 갖고 있나?
김상범 : 네? 담배요? 저 담배는 못 피웁니다.
배영민 : 저기 있잖나! 좀 갖다 줘.
김상범 : 네. (상범이 일어나 응접 테이블 위에 있는 세트에서 담배를 갖다 준다. 영민은 담배를 받아 유유히 라이터 불을 켜 불을 붙인다)
배영민 : 담배는 못 피워도 피울 줄 아는 사람에게 권할 줄은 알아야지!
김상범 : 앞으로 명심하겠습니다.
배영민 : 내가 누구지?
김상범 : 네? ...... 경리과장입니다.
배영민 : 내 이름이 뭔지 알고 있나?
김상범 : ...... 배...... 배 과장입니다.
배영민 : 흥! 그것 봐. 제 아무리 자네가 임시직원이라고 하지만 자기 직속상관의 이름쯤은 알아야지. 내 이름은 배영민이야.
김상범 : 명심하겠습니다.
배영민 : 자네, 기합을 안 받은 것만 해도 다행인 줄 알아.
이근삼의「국물 있사옵니다」는 1966년 발표된 희곡입니다. 주인공 김상범은 평범한 회사원입니다. 그는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았지만, 늘 손해만 보지요. 사랑하는 연인을 빼앗기고, 아버지 환갑잔치 비용을 졸지에 떠맡게 되며, 사람을 도우려다가 괜한 시비에 휘말리기까지 합니다. 회사에서도 상사로부터 무시당하며, 임시직이 정규직으로 바뀔 가능성은 보이질 않습니다. 그는 실망하고 절망합니다. 세상은 착한 사람의 편이 아니었던 것이죠.
김상범 : ... 저는 여태까지의 모든 생활을 제가 아는 상식의 테두리 안에서 해 왔습니다. 인천서 근무할 때의 일입니다. 여름에 하도 무덥기에 해수욕장에 나갔죠. 갑자기 저쪽 바위 밑에 옷을 입은 채 기어들어 가는 젊은 여자를 보았습니다. 틀림없는 자살입니다. 저는 밀짚모자를 내던지고 달려가 그 여자를 끌어냈습니다. 얼굴도 예쁜데 왜 자살을 하려고 했는지, 모래 위에 끌어내서 살렸더니 그 여자는 고맙다는 말 대신에 저의 뺨을 갈겼습니다. 그러니까 경찰은 저를 파출소로 연행하더군요. 이 사회에선 저의 상식이 통용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이제부터 물에 빠진 놈에겐 돌을 안겨 줘야겠습니다. 자리를 양보하느니 발로 걷어차 길을 터야겠습니다. 즉 기존 상식을 거부하는 겁니다. 우선 ‘새 상식’을 회사에서 한 번 실험해 보았습니다.
실망과 절망을 거듭하며 그는 흑화(黑化)하기로 합니다. 기존의 상식을 버리고 ‘새 상식’대로 살아가기로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익을 추구하는 태도, 출세 지향적 삶, 부와 권력 등 모든 것을요.
사 장 : ... 경리과장은 어디 갔나?
김상범 : 네, 배 과장은 돈 백만원을 가지고 요 앞에 있는 바구니다방으로 갔습니다.
사 장 : 백만원? 회사돈을......?
김상범 : 네, 저보고 백만원을 달라고 하기에.......
사 장 : 다방엔 뭣하러 갔나?
김상범 : 어떤 여자가 기다리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리구...... 성비서는 방금 여기에 있었는데.......
사 장 : 아, 비서는 이빨이 아파 치과에 갔다 온다고 나갔어...... 배과장이 가끔 돈을 가불하나?
김상범 : 글쎄...... 가불증을 안 쓰고 가끔 돈을 가지고 나가니...... 그 돈이 가불인지 모르겠습니다.
사 장 : 배과장이 쓰는 돈을 잘 알아두도록 해.
김상범 : 네, 계산을 해놓겠습니다.
사 장 : 그 다방에 있는 여자가 술집 여자인가?
김상범 : 모르겠습니다. 하기야.......
사 장 : 하기야......?
김상범 : 배과장이 약주를 참 좋아합니다. 점심 때도 가끔 한 잔씩 합니다.
사 장 : 회사의 돈을 맡고 있는 사람이......! (중략)
김상범 : (관객에게) 네, 재수가 없죠. 재수가 없습니다. 한달 후 경리과장은 강원도 지사로 발령을 받아 전출했고 제가 경리과장이 됐습니다. 회사에서는 저의 출세가 이렇게 빠른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내가 아는 상식을 버리고 새 상식에 의해 행동한 첫 효과였습니다.
바뀐 삶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적응 역시 빨랐지요. 경리과장이 회삿돈을 유용한다고 사장에게 모함하여, 상범은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합니다. 또한 타인의 스캔들을 이용해 협박하고, 심지어는 사장의 총애를 받던 임신 중인 여자와 결혼까지 합니다. 암흑가 건달에겐 회사 자금을 훔치도록 강도질을 종용하고, 뒤에서는 총을 쏘아 회사에서 공로까지 세우지요. 이 모든 게 출세를 위한 일이었습니다.
상범: 괜찮아. 나…… 경리과장 됐다.
상출: 뭐? 형이? 경리과장? 굉장한데! 어떻게 벌써?
상범: 사장이 날 신임하지. 또…… 나도 잘 살 수 있는 비결을 배웠고…….
상출: 봉급도 두 배쯤 오르겠네?
상범: 봉급이 문제냐. 그런데…… 너도 그 입사 시험인가 하는데 합격되려면…… 운동이 좀 필요하지 않을까!
상출: 무슨 운동?
상범: 돈을 좀 써야 하지 않을까? 세상은 다 그런 거야. (안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상출에게 쥐여 준다.) 이거 5,000원인데…….
상출: 5,000원?
상범: 돈을 좀 쓰란 말이야. 세상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단다. 문제는 방 안에 들어가야 하는데 앞문으로 들어가건 뒷문으로 들어가건 문제가 아냐. 어떻게 해서든지 그저 들어가면 돼.
동생의 취업을 알선하기 위해 거침없이 뇌물을 쓰는 상범. 그는 그것을 ‘운동’이라고 표현합니다. 그것이 그가 말한 ‘잘 살 수 있는 비결’이었지요.
김상범 : 기차를 몇 차례 갈아타고 저는 지금 부산행 열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밖에서는 심한 눈보라가 미친듯이 휘몰아치고 있습니다. 밤새 마신 술 때문에 이 머리는 깨질 것 같습니다. 이 엽총! 왜 그런지 불안합니다. 그래서 이 엽총을 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내 아내 아미는 서울로 떠났습니다. 내가 할 일은......? 까짓것 생각하면 뭣해요? 성아미, 즉 나의 신부의 배에 들어있는 애가 내 것일는지도 모르죠. 내년 8월에 나온다는 어린애가 진짜 내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억지로 해봅니다. 아니지.......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 점을 친다) 하하! 이거 앞쪽이 나타났습니다. 내 것인지도 모르겠는데요. 믿어보는 거죠. 이런 경우 어떻게 하겠습니다? 믿어볼 수밖에. (태풍소리가 더욱 요란해지며 기차는 속력을 최대한으로 내는 듯 기적이 목이 쉬어라 하고 절규할 때 서서히 암전되면서 막이 내린다)
작품의 결말에서 상범은 경리과장을 거쳐 결국 상무까지 오릅니다. 부와 권력을 손에 쥐었지요. 옛 상사도 그를 찾아와 굽신댑니다. 만족스럽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불안합니다. 상범은 어떻게 될까요? 바깥의 눈보라와 태풍 소리, 폭주하는 기차는 그의 끝을 암시하는 듯합니다.
학창 시절 이 작품의 주제를 ‘출세주의, 배금주의가 만연한 풍조 비판’이라고 배웠던 게 기억납니다. 그 외에는 사실 크게 와닿지 않았습니다. 학생 땐 출세라는 것도 잘 몰랐고, 돈도 많이 필요하지 않았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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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되어 작품을 다시 봅니다. 상범의 ‘새 상식’이 지금은 ‘기존 상식’, '당연한 상식'으로 된 것처럼 느껴집니다. 흑화한 건 정치인의 얼굴뿐만이 아닙니다. 엄정해야 할 수사 기관은 망가져 가고, 수많은 언론 역시 비판 대신 침묵과 찬양을 보내지요. 그런 현실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이 작품이 발표된 지 어느새 60년 가까이 되었지만, 아직도 갈 길은 멀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