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교과서에 실려있는 작품이긴 하지만 <소나기> 등에 비해 많이 알려진 작품은 아닙니다. 그게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으로 꼽을만한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면접관 역시 마찬가지였나 봅니다.
“음, 왜 그 작품인가요?”
의아해하는 표정이 눈에 보였지요.
그 지원자가 뭐라고 대답했는진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제 차례를 준비해야 했으니까요. 머릿속으로 어떻게 대답할지 정리해야 했기에, 답변을 듣고 있을 여유가 없었습니다.
저는 정철의 <관동별곡>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이유로는 위정자로서의 자아와 자연인으로서의 자아가 겪는 내적 갈등, 그리고 술과 꿈을 통한 해소가 인상적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내적 갈등은 조선시대뿐만 아니라 현대에도 지속되기에, 문학적 보편성을 지닌다고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봐도 무난한 답변이었던 것 같습니다.
결과는 다행히 합격이었습니다. <목넘이 마을의 개>라고 말했던 앞의 지원자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면접이라는 긴장된 순간이어서, 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작품 제목만 제 기억에 남았지요.
세월이 흘러 제가 가르치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교재를 펼쳐보니 황순원의 <목넘이 마을의 개>가 있습니다. 아, 그 작품! 왜 제 앞의 지원자는 이게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을까 궁금했습니다. 다시금 읽어 봅니다.
어느 해 봄철이었다. 이 목넘이 마을 서쪽 산 밑 간난이네 집 옆 방앗간에 웬 개 한 마리가 언제 방아를 찧어 보았는지 모르게, 겨 아닌 뽀얀 먼지만이 앉은 풍구 밑을 혓바닥으로 핥고 있었다. 작지 않은 중암캐였다. 그리고 본시는 꽤 고운 흰 털이었을 것 같은, 지금은 황톳물이 들어 누르칙하게 더러워진 이 개는, 몹시 배가 고파 있는 듯했다. 뒷다리께로 달라붙은 배는 숨쉴 때마다 할딱할딱 뛰었다. 무슨 먼 길을 걸어온 것도 같았다. 그러고 보면 목에 무슨 긴 끈 같은 것을 맸던 자리가 나 있었다. 이렇게 끈에 목을 매여 가지고 머나먼 길을 왔다는 듯이.
1948년에 발표된 이 작품의 배경은 목넘이 마을입니다. 동서남북 모두 산으로 둘러싸여 어디를 가려 해도 산의 길목을 넘어야만 하는 시골, 그래서 이름부터 목넘이 마을이었지요.
어느 해 봄, 그곳에 낯선 개 한 마리가 찾아옵니다. 뒷다리 하나를 절룩거리고 몸에는 황톳물이 든 신둥이(흰둥이)였지요. 신둥이는 마을 방앗간을 근거지로 삼고, 다른 개들의 먹이 그릇을 뒤지며 목숨을 부지합니다.
이튿날 아침, 일찍 일어나기로 유명한 간난이 할아버지가 수수깡 바자문을 열고 나오다가 방앗간 풍구 밑에 엎디어 있는 신둥이를 발견하고 되들어가 지게 작대기를 뒤에 감추어 가지고 나왔다.
미친개기만 하면 단매에 죽여 버리리라. 신둥이 편에서도 인기척 소리에 놀라 일어났다. 그러면 서 어느새 신둥이는 꼬리를 뒷다리 새로 끼고 있었다. 저렇게 꼬리를 뒷다리 새로 끼는 게 재미쩍다. 간난이 할아버지는 한자리에 선 채 신둥이 편을 노려보았다. 뒤로 감춘 작대기 잡은 손에 부드득 힘을 주며.
그래도 주둥이에 거품을 물었다든가 군침을 흘린다든가 하지 않는 걸 보면, 이 개가 미쳤대도 아직 그닥 심한 고비엔 이르지 않은 것 같았다. 눈을 봤다. 신둥이 편에서도 이 사람이 자기를 해치려는 사람인가 어떤가를 알아보기나 하려는 것처럼 마주 쳐다보았다. 미친개라면 눈알이 붉게 충혈되거나 동자에 푸른 홰를 세우는 법인데 도무지 그렇지가 않았다. 그저 눈곱이 끼어 있는 겁먹은 눈이었다... 미친개가 아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미치지는 않은 개다. 간난이 할아버지는 뒤로 감추었던 작대기 든 손을 늘어뜨리고 말았다.
신둥이는 마을을 떠돌아다니며 피해를 주는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사람들 눈에 곱게 보일 리 없었고, 미친개라는 소문이 났지요.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일찍 일어난 간난이 할아버지는 우연히 신둥이를 봅니다. 작대기를 꽉 쥔 채 조심스레 다가가지요. 개는 눈이 붉거나 침을 흘리고 있진 않습니다. 신둥이는 미친개, 광견병에 걸린 개가 아니었습니다. 다만 초췌하고, 겁먹은 상태였지요.
신둥이 역시 도망치지 않습니다. 간난이 할아버지가 자기를 해칠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린 것이지요. 그 모습을 보며 간난이 할아버지는 작대기를 내려놓습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신둥이의 진짜 모습을 알지 못합니다. 간난이 할아버지 역시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아침에 잠시 착각했나 오해를 하지요. 결국 신둥이는 사람들의 몽둥이를 피해 뒷산으로 쫓겨나고, 동네에 있던 다른 개들은 신둥이와 함께 있었다는 이유로 잡아먹힙니다. 신둥이의 수난이지요.
동네 사람들이 방앗간의 터진 두 면을 둘러쌌다. 그리고 방앗간 속을 들여다보았다. 과연 어둠 속에 움직이는 게 있었다. 그리고 그게 어둠 속에서도 흰 짐승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분명히 그놈의 신둥이 개다. 동네 사람들은 한 걸음 한 걸음 죄어들었다. 점점 뒤로 움직여 쫓기는 짐승의 어느 한 부분에 불이 켜졌다. 저게 산개의 눈이다. 동네 사람들은 몽둥이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이 속에서 간난이 할아버지도 몽둥이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한 걸음 더 죄어들었다. 눈앞의 새파란 불이 빠져나갈 틈을 엿보듯이 휙 한 바퀴 돌았다. 별나게 새파란 불이었다. 문득 간 난이 할아버지는 이런 새파란 불이란 눈앞에 있는 신둥이 개 한 마리의 몸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여럿의 몸에서 나오는 것이 합쳐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말하자면 지금 이 신둥이 개의 뱃속에 든 새끼의 몫까지 합쳐진 것이라는. 그러자 간난이 할아버지의 가슴속을 흘러 지나가는 게 있었다. 짐승이라도 새끼 밴 것을 차마?
이때에 누구의 입에선가, 때레라! 하는 고함소리가 나왔다. 다음 순간 간난이 할아버지의 양 옆 사람들이 욱 개를 향해 달려들며 몽둥이를 내리쳤다. 그와 동시에 간난이 할아버지는 푸른 불꽃 이 자기 다리 곁을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뒤이어 누구의 입에선가, 누가 빈틈을 냈어? 하는 흥분에 찬 목소리가 들렸다.
시간이 흘러 어느 여름밤, 사람들은 방앗간 주위로 모입니다. 한밤중에 신둥이가 그곳으로 들어가는 걸 누군가 목격했거든요. 다들 몽둥이를 들고 포위망을 좁혀갑니다. 절체절명의 순간입니다. 하지만 간난이 할아버지는 신둥이가 새끼 밴 것을 보고 빠져나가도록 내버려 둡니다. 동장으로부터 한소리 들었지만, 중요한 건 생명이었습니다. 뱃속에 담긴 것을 살리는 게 더욱 가치 있다고 본 것이지요.
... 나무 한 짐을 해가지고 돌아오는 길에, 무심코 길 한옆에 눈을 준 간난이 할아버지는 거기 웬 짐승의 새끼가 몽켜 있는 걸 보았다. 이게 범의 새끼나 아닌가 하고 놀라 자세히 보니, 그것은 다른 것 아닌 잠든 강아지들이었다. 그리고 저만큼에 바로 신둥이 개가 이쪽을 지키고 서 있는 것이었다. 앙상하니 뼈만 남아가지고.
간난이 할아버지가 강아지께로 가까이 갔다. 다섯 마린가 되는 강아지는 벌써 한 스무날은 넉넉히 됐을 성싶었다. 그러자 간난이 할아버지는 다시 한번 속으로 놀라고 말았다. 잠이 들어 있는 다섯 마리 강아지 속에는 틀림없는 누렁이가, 검둥이가, 바둑이가 섞여 있는 게 아닌가.
겨울이 오자 간난이 할아버지는 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우연히 강아지 새끼들을 보게 됩니다. 누렁이, 검둥이, 바둑이 등 다섯 마리나 되었지요. 뼈만 앙상하게 남은 신둥이는 저 멀리 떨어져서 그 모습을 바라봅니다. 아마도 잘 부탁한다는 마음이었을까요? 할아버지는 새끼들을 데려와 몰래 보살펴 줍니다. 그리고는 적당히 컸을 때 아무 곳 아무개한테서 얻어 오는 것이라며 이웃들에게 나눠주었지요. 그로 인해 마을 개들은 신둥이의 피를 이어받게 됩니다. 이것은 어린 '나'가 중학 이삼 년 시절에 외가가 있는 목넘이 마을에서 간난이 할아버지를 포함한 마을 사람들에게 들은 얘기라며 작품은 끝나지요.
리얼리티를 부여하기 위한 액자식 구성. 우리 민족의 수난과 강인한 생명력을 상징하는 신둥이. 휴머니즘.
학창 시절에는 작품을 이렇게 배웠습니다. 작품의 구성, 소재의 상징성, 주제이지요. 전부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공부해서인지 감동은 없었습니다. 전문을 읽어보지도 않았고, 기억에 남는 작품도 아니었지요.
세월이 흘러 작품을 다시 봅니다. 당시는 배고프고 어려운 시절이었습니다. 고기가 귀했고, 뭐라도 잡는 날이면 마을엔 잔치가 벌어졌지요. 그런 상황에서 떠돌이 미친개에게 베풀 관용은 없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신둥이를 잡으려고 방앗간을 포위할 땐 ‘언제 대보았는지 모르는 비린 것을 한번 입에 대보았으면 하는 생각뿐’이었다는 표현도 나오지요.
그런 야만과 폭력의 상황에서도 간난이 할아버지는 신둥이가 도망갈 틈을 만듭니다. 새끼 밴 것을 차마 죽이지 못하겠다는 생각 때문이지요. 모두의 의사에 반하는 쉽지 않은 찰나의 결정이었습니다.
그 끝은 아름답고도 감동적입니다. 산에서 우연히 발견한 신둥이의 다섯 새끼들. 그것들을 키우고 널리 퍼뜨려 이제 목넘이 마을에서 기르는 개는 거의 다 이 신둥이의 증손이 아니면 고손이 되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 그리고 이런 말을 전하는 간난이 할아버지는 흰서릿발이 된 텁석부리 속에서 미소를 띄웁니다. 자신의 이익에는 극도로 민감하지만, 타인의 손해에는 대체로 무관심한 시대에, 저도 이런 미담(美談)을 가진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문득 합니다. 아, 다시 보니 참 좋은 작품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