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독된 마음을 넘어서 치유의 힘을 보다
15년 전, 제가 SF&판타지 도서관을 연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하루는 제가 도서관에 있는데, 한 아이의 어머님께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그분은 매우 절박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이가 판타지 소설만 보면서 학교도 안가려고 해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사실, 조금 당황했습니다. 우선은 이런 내용에 내가 이야기해도 좋은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얼마나 절박하면 이런 작은 개인 도서관 운영자에게 전화를 할까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없는 지혜를 총동원해 몇 가지 말씀을 드렸습니다.
"한번 도서관에 같이 오셔서 이야기하는 것도 좋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긴 했지만, 사실 그 때 저는 책에 빠져서 학교도 안 가는 상황을 잘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물론 '은둔형 외톨이' 같은 말이 있으니 무언가에 열중하면서 집에만 머무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겠죠. 그래도 제 자신이 그걸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저 자신이 비슷한 상황에 빠졌습니다.
판타지는 아니고 무협 소설이었지만, 끝없이 소설을 읽으며 제대로 일상을 보내지 못했습니다. 일은 했지만 제대로 작업이 되지 않았고, 거의 의무적으로 자리에 앉아 있는 느낌. 머리에서는 끊임없이 '다음 책을 보자.'라는 말이 들려오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읽어댄 이야기들의 내용은 대부분 비슷했습니다. 이른바 무적 주인공의 무적 이야기. 읽는 동안은 몰입하고, 내가 굉장한 사람이 된 것처럼 느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가 끝나면 이내 다음 이야기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 순환이 계속됐습니다.
EBS의 강연 방송 〈위대한 수업〉에서 그 이유를 설명해주는 내용을 보았습니다. 스탠퍼드 의대 정신과 교수 애나 렘키는 본인이 로맨스 소설에 빠졌던 경험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뇌의 도파민 보상 회로가 쾌락을 얻는 순간 균형을 맞추기 위해 반대 방향으로 기운다고 설명합니다. 그 기울어짐이 다음 자극을 찾게 만드는 갈증이 된다는 것이죠. 나중에 이 강연을 보았을 때, 그때의 제 상황이 바로 이것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이를 학생들에게 '사이다에 중독된 상태'라고 말합니다. 흔히 이야기에는 사이다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분명히 사이다는 상쾌한 기분을 줍니다. 하지만 마시고 나면 시원했던 기억만 남고, 이내 더욱 강한 갈증이 밀려오는 것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저의 1년이 그랬습니다.
그런 일이 나에게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작 그 안에 있을 때는 전혀 몰랐습니다. 나중에 돌아보고 나서야 정말로 놀랐습니다.
빠져나온 것은 우연이었습니다. 김용의 무협소설을 다시 읽으면서 무언가 알 수 없는 만족감을 느꼈습니다. 사이다만 들이켰을 때 계속되는 갈증을, 따뜻한 차 한 잔으로 풀어내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러한 경험을 겪은 이후, 저는 그때의 전화를 다시 떠올리며,
그 질문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판타지라는 이야기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어린이 신문, 소년 중앙에 판타지에 대한 칼럼을 쓰고 있습니다. 이번으로 99회, 이제 곧 100회를 맞이합니다.
8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어온 이야기.
그 사이 판타지에 대해 수많은 이야기를 했고, 그것을 모아 책으로 내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제게 판타지는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그때 처음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사람을 어디로 이끄는가라는 것을.
판타지라고 하면 흔히 중세 유럽풍 세계를 떠올립니다. 갑옷을 입은 기사, 마법사, 용. 하지만 판타지는 훨씬 넓습니다. 신비한 일이 일어나는 세계의 이야기라면 모두 판타지입니다. 《신데렐라》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도 판타지입니다. 우리가 사는 도시 어딘가에서 펼쳐지는 도시 판타지도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우리와 완전히 다른 세계로 들어가 모험을 펼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반지의 제왕》이 대표적입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나중에 "다른 세계를 직접 체험한다"는 롤플레잉 게임의 토대가 되기도 했습니다.
《반지의 제왕》을 쓴 톨킨은 판타지를 "도피의 문학"이라고 불렀습니다. 현실에서 벗어나 다른 세계로 향하는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말을 조금 다르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한 작품이 떠오릅니다. 미하엘 엔데의 《끝없는 이야기》. 제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용돈을 모아서 처음 산 책입니다.
《끝없는 이야기》의 주인공 바스티안은 통통하고 소심한 아이입니다. 운동도 공부도 못하고,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습니다. 어느 날 그는 우연히 기묘한 책을 손에 넣고, 학교 창고에 숨어 읽기 시작합니다. 그 책 속의 세계, 환상계는 점점 사라져가고 있었고, 그것을 구할 존재가 바로 바스티안이었습니다.
바스티안은 환상계에서 무한한 힘을 얻습니다. 말 한마디로 산을 만들고,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이룰 수 있게 됩니다. 현실에서 아무것도 아니었던 아이가 세계의 창조주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판타지의 매력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뇌는 스토리와 현실을 완전히 구분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책 속 주인공이 위기에 처하면 심장이 빨라지고, 감동적인 장면에서 눈물이 납니다. 주인공이 놀라운 힘을 발휘할 때, 우리는 그것을 간접적으로 체험합니다. 현실에서 무력하게 느끼는 사람일수록 그 만능감에 깊이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끝없는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환상계의 힘에 취한 바스티안은 현실을 잊어갑니다. 가족도, 친구도, 자신이 누구인지도. 그리고 결국 환상계에서 길을 잃을 뻔합니다. 그를 구한 것은 환상계에서 사귄 친구 아트레유였습니다. 바스티안은 그 모험을 통해 현실로 돌아오고, 아버지와 화해하며 한 발짝 성장합니다.
"이 일에 익숙해지려면 나도 시간이 걸릴 것 같구나."
바스티안이 변한 모습에 아버지가 말합니다. 불과 하루밤에 불과한 짧은 이야기. 정말로 환상계로 다녀왔는지 아니면 책을 통해 경험한 환상인지 알 수 없는 그 여정이 초라한 소년 바스타인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판타지는 단순히 강한 힘을 발휘하는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얻는 것은 힘이 아니라, 그 세계를 지나온 경험입니다. 낯선 세계에서 시련을 만나고, 선택을 하고, 때로는 친구를 잃으면서 나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그 여정을 간접적으로 함께 걷습니다. 그리고 그 경험이 쌓이면, 현실의 시련 앞에서도 조금은 다르게 설 수 있게 됩니다. 마음의 근육이 생기는 것입니다.
소설 마지막에 서점 주인 코레안더 씨는 바스티안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에는 환상계로의 문이 얼마든지 있단다. 어떤 이는 이를 찾지 못하고, 어떤 이는 여기서 빠져나오지 못하지. 그리고 환상계로 갔다가 돌아오는 이들이 있지. 바스티안 너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양쪽 세계를 건강하게 만든단다."
판타지는 도피의 문학일 수도 있고, 치유의 문학일 수도 있습니다. 결국 그 차이는 이야기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마음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판타지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요?
[ 영화로도 소개되며 눈길을 끈 '끝없는 이야기'는 읽을 때마다 제게 힘을 줍니다.
여러분에게는 어떤 이야기가 있으신가요? ]
( The Neverending Story / Neue Constantin Film, Warner Bro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