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판타지 도서관이 말해주는 나의 마음

- 책에서 창고로, 창고에서 서재로

오늘도 SF&판타지 도서관의 문을 엽니다. 2009년 문을 연 이래로 계속되는 일상. 일주일에 하루. 금요일 오후 시간. 제가 홀로 문을 열고 정리하며 찾아오신 분을 맞이합니다.

하루에 한두 분. 때로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일도 있습니다. 제 자신, 그다지 신경쓰지 않지만, 그래도 새로운 분이 찾아오시면 설레는 마음이 있습니다.


문 앞에 서면, 동그란 틈 너머로 전혀 다른 세계가 보입니다.책으로 가득 찬 공간이지만, 단순한 서가도, 익숙한 도서관도 아닙니다.이곳은 과연 무엇일까요?


지난 주에는 한 작가분이 찾으셨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어떻게 알고 오셨나요?"라고 묻자, 꽤 전에 인터넷에서 봤는데, 그때는 열지 않았다고 하십니다. 제가 방황하던 시기에 찾아오신 분이 계셨다는 점이 부끄럽게 느껴지면서, 한편으로는 일주일에 하루라도 계속해서 다행이라 여겼습니다. 한편으로 제가 너무 이곳을 알리는데 게을렀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죠. 그 분과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특히 이런 도서관을 어떻게 만들게 되었는지를 궁금하게 여기시더군요.


“왜 SF&판타지 도서관을 만들게 되었나요?”


수없이 들은 질문입니다. 초반에 이런 질문을 들었을 때는 뭔가 그럴듯한 대답을 찾아서 이야기했습니다.

SF 팬으로서 좀 더 많은 분이 SF를 봐주었으면 한다. 제가 가진 책을 남들과 나누고 싶었다. 말하면서도 어딘가 이상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닌데, 내 말이 아닌 것 같은 느낌. 마치 누군가 들었을 때 고개를 끄덕일 만한 대답을 고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 어색함이 풀린 건 어느 날 친한 사람과 말하던 도중이었습니다.

"사실은 별게 아니었어요. 집에 책이 너무 많았는데 창고가 필요했죠. 친척집 지하에 빈 창고가 있다기에 가봤더니, 생각보다 넓더라고요. 그 순간 생각했습니다. 기왕이면 남도 볼 수 있게 도서관을 만들면 어떨까? 보드게임도 하고 모임도 할 수 있게 회의실도 만들고. 취미로 시작한게 어쩌다보니 이렇게 되었죠."

말하는 순간, 마음이 확 풀렸습니다. 아, 이게 진짜였구나.


그 뒤로는 인터뷰에서도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창고가 필요했다고. 지하실이 넓어 보였다고. 대답하는 내가 즐거웠고, 듣는 상대도 더 재미있어했습니다. 내 이야기를 하는 게 이렇게 즐거운 일이었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 즐거움이 어느 순간 움츠려 들었습니다. 왜 자기 이야기만 하느냐는 말을 들었을 때였습니다. 당시 연희동 도서관은 서대문구 전문도서관 1호이기도 했고, 규모도 꽤 커져 있었습니다. 공공 공간으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스며들기 시작했습니다. 나를 도서관에서 분리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나 자신이 잠시 들른 손님처럼 여겨지기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책 앞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습니다.하지만 그 순간, 나는 어딘가 어색했습니다.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아, 여기는 외부에 공개된 책 창고구나.’


그래서, 2018년 도서관문을 닫았습니다. 언젠가 다시 열기로 하면서.

하지만, 어떻게 하는게 좋은지 저 자신도 알지 못했습니다. ‘다시 하고 싶다’라는 마음이 있었지만, 왜 해야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고 싶은지 떠오르는게 없었죠.

그러다 보니 한참 늦어졌습니다. 2020년 파주에 다시 문을 열었지만, 마음은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급하게 만들어진 장소.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실패한 느낌도 있었습니다. 공간이 훨씬 좁아진 것도 있었지만, ‘좀 더 다른 모습이 필요하지 않을까?’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파주로 옮기고 얼마되지 않아서 한 잡지와 인터뷰를 하게 되었을때, 앞으로의 비전 같은 여러 이야기를 했지만, 마음은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잠깐 있다가 옮기자. 우선은 어떻게 만들지를 고민해보고.’ 내심 이렇게 생각하며, 이곳에 머무르지 못했죠.

그 결과, 다시금 오랜 기간 이 공간은 창고로 머물렀습니다.


하지만,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제게 하나의 계기가 찾아왔습니다. 오래 해온 강의를 새롭게 준비하는 과정에서 문득 느꼈습니다. ‘아, 내가 이걸 좋아하는구나. 그래서 이렇게 계속하는거구나.’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내가 그것을 좋아하는 이유를.


편안한 의자 뒤에, 누군가의 코스튬이 서 있습니다.도서관이라고 부르기에는, 어딘가 어색한 공간.그렇다면, 나는 왜 이런 공간을 만들었을까요?


좋아한다는 사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왜 좋아하는지를 깨닫는게 필요했습니다.


그때부터 이 공간을 바라보는 방식이 달라졌습니다.

책을 정리하는 일이 재미있어졌고, 한 권 한 권을 손에 들 때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가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조금씩, 이곳이 다시 저의 공간이 되어갔습니다.


오늘은 도서관이 조금 붐빕니다. 일찍부터 여러 분이 이곳을 찾아 이야기를 나누고 책을 보았습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앞으로도 이곳은 제가 홀로 머무르며 이따금 찾아오는 분을 맞이하는 곳으로 남겠지요. 더 넓은 공간. 더 많은 손님. 욕심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지금은 그대로도 충분합니다. 그래서 작가분의 질문에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도서관은 저의 장소입니다. 외부에 열린 저의 서재예요. 여기 있는 책 한 권 한 권이 제가 무엇을 좋아하고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찾아오시는 분은 사실 저라는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오시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SF&판타지 도서관이라는 이름으로 오셨더라도."


오랜 방황 끝에, 이곳이 제게 어떤 의미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왜 이곳을 계속하는지도요.


하지만 여전히 하나의 질문은 남습니다. 과연 이 공간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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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전히 거창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 앞에는 아직도, 정리되지 않은 책 13,000권이 남아 있습니다.

이걸, 언제쯤 다 정리할 수있을까요? ]



파주에서 개인 도서관을 운영하며, 인간의 마음과 세계관을 이야기합니다. 인간의 문화, 사회, 작품에 담긴 마음을 통해 세계를 바라보고, 그 세계관을 통해 태도와 지성을 생각합니다. 많은 분과 이런 마음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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