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아구구구 아우” 연신 신음소리를 내며 잤다. 나는 거실에서 TV 보다가 노동의 피로가 무겁게 짓눌러 고꾸라져 잠들고 안방에서 자는 아내의 신음소리를 간헐적으로 들으며 잤다. 나도 어제 하루 종일 밭을 일구느라 삽질을 많이 해서 허리도 아프고 여기저기 쑤셨다. 처남은 팔뚝을 들기 힘들 정도로 근육통이 와서 힘들어한다. 나도 둘째 처제도 삽질과 호미질로 방아쇠 수지 증후군이 와서 조심조심 일을 하고 있다. 열심히 일한 훈장인가? 하면서 일은 포기하지 않는다. 육체적 고통보다 정신적 평화를 얻으니 몸을 사리지 않는 거 같다. 먹고살려고 하는 일이라면 다르겠지만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하는 일이니 더욱 포기할 수 없다. 정원을 가꾸어 삶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고, 채소 값도 만만치 않으니 먹거리 정도는 생산해서 자급자족하고, 약초도 재배해서 쓸 생각이니 즐거운 일이다. 무엇보다도 인생 후반에 오 남매가 주일마다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소중하기 때문에 육체적 고달픔은 뒷전으로 밀려나는 거 같다.
난 농원 들어가는 입구의 삼각형 땅을 일구었다. 약초도 심고 생강도 심을 예정이다. 덤불을 낫으로 제거하고 한 삽 한 삽 땅을 일구는 일은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1년 동안 열심히 해서인지 이젠 길이 났다. 일이 두렵지가 않다. 작년에 씨를 뿌렸던 도라지를 옮겨 심느라 파 보니 귀여운 새끼 도라지들이 많이도 들어 있었다. 잘 자라고 있었나? 궁금했었는데 귀엽게 잘 자라 뿌리를 저장하고 있었다. 내년엔 하나하나 옮겨 심어야 된단다. 육체적으로 힘들지만 운동하는 기분이고 아무 생각이 없으니 정신적으로 힐링 제대로 되는 시간이다. 땅을 일구고 있는데 이웃집의 방문객이 구경 왔다. 주일마다 뭘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하는지 궁금해서 왔다고 한다. 집을 지었으니 구경차 온듯하다. 잠시 처음 보는 방문객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잠깐 휴식을 하고 쉬지 않고 밭을 만들었다.
아내는 둘째 처제와 남아있는 꽃씨를 여기저기 많이 뿌리고 꽃밭을 정리하고 나물도 뜯고 열심히 움직여서 몸이 많이 볶이는 모양이다. 옆 집 밭에 가서 냉이를 뜯고 있는데 강적이 나타났단다. 옆집 아주머니는 1년 동안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는데 이번에 나타났다. 맘 좋은 이웃 아저씨라 편했는데 이젠 조심해야겠단다. 밭을 빠댔다고 뭐라고 했단다. 나물을 많이 캐가서 심통이 났나 보다. 인상도 말투도 고약하단다. 강호의 강적은 예기치 않게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데 이 아줌씨 계속 나타나려나? 걱정이다. 분위기로 보아 오디·산딸기 채취는 불가능할 거 같은 예감이다.
“이상하네? 아프긴 한데 피곤하진 않네?”
“나도 그래. 삽질을 많이 해서 허리는 아파도 피곤한 줄 모르겠어. 점심 저녁을 맛있게 먹어서 그런가? 당신은 하루 1끼 먹던 식사를 2끼나 먹어서인가?”
돌아오면서 차 안에서 그렇게 얘기했다. 몸이 아프면 짜증이 나겠지만 우리는 피곤하지도 않고 짜증도 나지 않는다. 1주일 중에 하루를 얼마나 잘 쓰고 있는지 새삼 느껴진다. 감사한 시간이다.
‘即時現今, 更無時節’ (지금 이 순간은 다시 오지 않는다)
책상 위에 놓인 법정스님의 말씀이 와 닿는다.
어제도 점심·저녁 메뉴는 또 새로운 밥상이었다. 점심에 청국장에 나물 넣고 비벼먹었다. 나물은 냉이, 지칭개 나물을 현장에서 뜯어먹으리라 했는데 둘째 처제의 손길로 소고기 냉이 비빔밥을 해줘서 새롭고 맛있는 식사를 했다. ‘요리 샘’ 처제가 있어 참 잘 먹는다. 새참으로 부침개를 해줘서 배가 고프지 않아 저녁은 늦게 먹었다. 불 사랑으로 불이 된 나는 목청껏 소리 내어 노래를 불렀다. 농원에서의 마지막에 난 불이 되고 싶은가 보다. 불을 좇는 불나방은 아닌 거 같고, 쓰레기를 모두 태우고 마음의 찌꺼기를 태워버리는 불의 마음이다. 불같은 열정이 내 안에 살아있다고 생각한다. 불같은 사랑!
이야기를 하다가 밤 11시 30분에 농원을 나왔다. 둘째 처제의 억울했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듣다가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너무 억울해서 울기도 많이 울었단다. 그래서 울음 끝이 길었다고 한다. 평생 억울한 인생을 사는 거 같다고 한다. 무엇으로 보상하리오! 오 남매의 중간에 태어나 위로 언니 둘의 옷을 물려받아 입고 새 옷은 입어 보지도 못하고 아래로 외아들인 남동생과 막냇동생은 수재 소리들을 정도로 공부를 잘했으니 가운데에 끼어 구박덩이로 살았다고 한다. 무엇이든 예쁘게 만들고 꾸미는 걸 좋아하고 잘 만들고 재주가 많았던 어린 시절, 그때 어른들이 못 알아보고 소질을 계발하도록 밀어주지 못했으니 한스럽기는 하겠다. 디자이너를 했으면 성공했을 거란다. 어른들의 잘못이지. 그 당시는 손재주가 많으면 팔자가 드세다고 싫어했었단다. 그래서 많이도 혼나고 상처를 받았단다. 공부 잘하는 사람만 칭송하고 사랑받았으니 웃픈 사실이다. 어른이 돼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스타일리시하게 살고 그림도 그리고 첼로도 연주하면서 살고 있으니 잘 사는 거 아닌가! 요리 솜씨는 탁월해서 많은 사람들을 음식으로 행복하게 해 주니 정말 좋은 재주를 타고난 거라 생각한다.
막내 처제의 어린 시절도 잠깐 돌아봤다. 똑 부러지는 성격이 어려서부터 특별했단다. 막내이면서도 어리광도, 생떼도 부린 적도 없고 일찍이 독립했던 거 같다. 손이 갈 일이 없었다니 특별한 캐릭터였다. 언니가 일을 시켜도 자기 할 일 아니라고 거절하면 끝이었단다. 오빠가 데리고 다니고 싶어서 놀러 가자면 "싫어" 하면 끝이었단다. 머리가 좋고 자기 할 일은 똑 부러지게 잘하니 열심히 공부해서 의사가 되었다. 큰 처제는 힘이 좋아 힘쓰는 일은 몸 약한 언니를 대신해서 많이 했고, 열심히 공부하고 혼날 일은 요령껏 피해서 어른들한테 많이 혼나지 않았단다. 생존전략은 뛰어나서 형제들이 단체로 혼나도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니 약빠르게 대처하는
능력이 있었던 것이다. 생활력이 강해 일을 많이 하고 살아서 지금은 일을 하는 게 싫다고 한다. 가장 노릇하며 몸이 부서지도록 일을 해서 몸도 많이 망가졌다고 한다. 그래서 농원에서는 노동은 하지 말라고 하고 식사 당번을 맡겼다. 어려서의 캐릭터와 지금의 캐릭터를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었다. 지난 얘기를 숨김없이 꺼내놓고 하니 하하호호 웃으면서 시간 가는 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