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 → 공동체주의 → 다문화주의 → 사회적 커미트먼트 → ?
마이클 샌델은
존 롤스의 '무지의 베일'을 '무연고적 자아'라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면서
마이클 샌델은
'연고적 자아'를 주장하며 '공동체주의'를 주장한다.
사람은 반드시 타인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롤스의 '무지의 베일'을 놓아 버린다.
하지만
사람이 '연고적 자아'일지라도
무언가 평가를 받을 시에는
'무지의 베일'을 적용해야 할 것이다.
사람이 평가를 받는 자리에 섰다는 것은
오롯이 그 사람 혼자만의 힘으로 그 자리에 선 것은 아님은 분명하므로
'연고적 자아'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평가를 받을 시에 '무지의 베일'을 적용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연고에 의해 불공정하게 평가를 받게 될 것은 분명하다.
굳이 '무연고', '연고'라는 용어로 한정 지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사람이 어떤 능력과 실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반드시 '연고'가 필요한 것이고
그 사람이 평가를 받아야 할 때에는
베일을 가린 채 정당하고 공정하게
그 사람의 능력과 실력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무연고'가 되어야 할 것이다.
아울러
사람은 '연고적 자아'이므로
공동체가 형성될 수밖에 없으므로
그리고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므로
반드시 공동체를 이루어야 하기 때문에
'공동체주의'라는 이름을 지우는 것 역시
어떤 한계를 도래하게 될 것이다.
공동체 안에서도
'군중 속의 고독'을 느끼는 개인이 존재하므로
온전히 공동체가 대안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공동체가 어떤 한 부분의 대안이 될지라도
전체적으로는 대안이 될 수 없으므로
어떤 의미를 이름 지워버리면
그 이름으로만 판단하게 되는 것처럼
그 의미가 축소되고 한정돼 버려 한계를 드러내게 될 것이다.
모든 철학 이론들이 한계가 있는 것은
이름으로 명명해 버린 것 때문일 것이다.
이름으로 명명해 버린 순간
그 이름에 의한 영향으로 생각의 방향이 한쪽으로 몰아지게 되는 것이다.
그저 개념만 놓고 사고를 확장해 간다면
한계가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철학 사조를 살펴보면
최대의 이익만을 바라보는 공리주의에서
양적으로 볼 것인지 질적으로 볼 것인지에 따라
양적 공리주의와 질적 공리주의가 탄생하고
개인을 강조하는 자유주의에서
국가가 개입할 것인지, 개입하지 않을 것인지에 따라
자유주의와 자유지상주의로 세분화되고
사람이 개인으로서 아무리 자유롭더라도
그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반드시 받을 수밖에 없다는 데서
공동체주의가 탄생하고
이렇게 형성된 공동체가
지역에 따라 서로 다른 문화를 배척해서는 안 되고
존중하고 인정해야 한다는
다문화주의가 탄생한다.
이어
이러한 '공동체' 속에서
개인과 개인 간의 관계를 위한 '공감'이 강조되고
그 공감을 넘어선 사회적 커미트먼트가 탄생한다.
바로 사회적 헌신, 책무이다.
지금까지만 보더라도
자유주의 --> 공동체주의 --> 다문화주의 --> 커미트먼트(사회적 헌신, 책무)로
개인이 전체로 나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역사가 순환하듯이 철학 사조도 순환한다고 볼 수 있겠다.
개인을 강조하는 '자유주의'가 탄생하기 전 시대는
'국가 중심' 또는 '종교 중심'의 전체를 강조하지 않았는가.
유목민 시절은 '개인'이 중심이다가
한 곳에 정착하게 되면서 농업체제가 생기고 '전체'가 중심이 되고
그러다가 '전체'에 반기를 들면서
'개인'이 중심이 되고
그 '개인' 중심의 부작용으로 인해
'공동체'가 등장하고 '다문화'에 이어
'사회적 헌신, 책무'까지 흘러나왔다.
결국
역사가
개인 → 전체 → 종교(전체) → 개인 → 전체로 흘러가듯
철학 사조도
유목민(개인) → 농업(전체) → 종교(전체) → 자유주의(개인) →
공동체주의(부분적으로 전체) → 다문화주의(전체) → 사회적 헌신, 책무(전체)로 흘러왔다.
철학 사조가 '전체' 중심으로 흘러와서 그런지
현대 철학자들을 보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옹호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옹호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과 자유를 철저히 무시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도 폐단이 있지만
자본가와 권력자에 의해 변질된 것뿐이다.
권력은 권력자를 변질시켰고
자본주의는 창출한 이익을 모두 재투자했을 때 유지되는 데도 불구하고
소위 윗물들이 대부분을 가져가버리고 나머지만을 투자하기 때문에 변질된 것이다.
정치적인 흐름은
부족장 → 영주 → 왕 → 대통령 → 독재자로
흘러가는 듯하다.
이것은
'세계화'의 문제점이 지금 드러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지금 세계는 자국 중심의 '쇄국 정책'을 취하는 분위기이고
CCTV에 의해서 국민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분위기가 전개되고 있으며
서로가 서로를 얼마든지 고발할 수 있으며
최후의 보루인 법이 어느 한쪽으로 편향되어 버렸으며
마음만 먹으면 어느 한 사람의 이력을 정확하게 조회할 수 있고
또 마음만 먹으면 어느 한 사람을 범죄자로 만들 수도 있는 세상이다.
이는 개인 중심이라기보다 전체 중심이면서 독재의 냄새를 풍긴다.
자기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몰입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겠지만
이런 분위기가 말이 아닌 현실로 드러나는 시점에서
우리는 정치적인 관심을 지금보다는 좀 더 가져야 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정치적인 동물이다'
라고 말하는데
지금까지의 역사를 보았을 때
인간은 본성보다 권력에 더 관심을 가져왔다는 것이 이를 증명하는 것이다.
개인 대 개인은
도덕, 윤리, 상식에 의한 인간 본성 중심으로 바라보고 상업적인 거래를 하기에
정치적이라고 볼 수 없는 경우도 있지만
삼삼오오 모인 집단에서는 서열관계를 찾게 되고
권력 곧 파워게임이 연출되기도 하는 것을 보면
'인간은 정치적인 동물이다'에서 출발점을 삼는 것이
인간을 위한 어떤 답을 찾는데 빠른 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국가 대 국가는 당연히
권력 곧 파워게임에 충실한 정치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제 여기서 더 전체적으로 흘러갈지
아니면 여기서 다시 개인으로 돌아갈는지는
앞으로 흘러갈 시대적 흐름에 달려있겠다.
아마
더 전체적으로 흘러가서
자본가와 권력자가 암합 하여
당근과 채찍으로
곧
돈과 쾌락과 법으로
개인을 통제하고
개인을 눈앞의 환상만 추구하는 무지한 바보로 만들고
개인을 자본가와 권력자들의 영달을 위한 부품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지금 기성세대야 어떻게 흘러가든 별문제가 없겠지만
뭐 살 만큼 살았지 않는가.
젊은 청년들과 어린 청소년들은
앞으로 닥칠 상황은 녹록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사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살아갈 것이다.
어쩌면 생각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