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도구적 이성 VS 문화 산업](2)

'도구적 이성'에는 반드시 `함정`이 있는 이유



[칼럼] [도구적 이성 VS 문화 산업](1)

https://brunch.co.kr/@52168600bfee4e5/25


테어도어 아도르노는


1903년 태생의 독일의 사회학자, 철학자, 피아니스트, 음악학자 그리고 작곡가였다.

그는 막스 호르크하이머와 더불어 프랑크푸르트 학파 혹은 비판이론의 1세대를 대표하는 학자이다.

저서로 <계몽의 변증법>, <부정 변증법>, <미학 이론> 등이 있다.

[출처] 위키백과 -테어도어 아도르노-


900%EF%BC%BFScreenshot%EF%BC%BF20250713%EF%BC%BF231733%EF%BC%BFGoogle.jpg?type=w966 구글 이미지 -테어도어 아도르노-


아도르노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로부터 도망쳐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이 과정에서 아도르노는


왜 인류는 인간적 상태에 놓이는 대신 일종의 야만 상태로 빠져드는 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에 대한 대답이 호르크하이머와의 공동 저작물인 <계몽의 변증법>이다.


계몽의 변증법


계몽이란, 신화와 무지의 세계에서 벗어나 이성의 힘으로 세상을 밝힌다는 뜻이다.


하지만 아도르노는

이러한 '이성'이 사고의 방향을 고정시켜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만듦으로써

'과학적', '수학적'인 사고방식만을 통해 이성이 합리적인 도구로 사용되어


우리의 '기분'이나 세계의 '분위기' 같은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들은

'이성적'이지 않은 것으로 제외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이러한 '이성'은 '합리성에서 벗어난 다른 생각'들을 막음으로써
계몽의 체계에서 '동일한 생각'을 하도록 교육받게 된다는 것이고
동일한 생각을 강요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동일한 생각을 하는 사회는 '비판'의 능력이 사라져 버린 사회이고

비판이 사라진 사회는 나치와 같은 파시즘의 사회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나치가 합리성을 주장하며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했었던 것을 생각해 본다면

'계몽'은 또 다른 '신화'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신화'를 분석해 보면 계몽과 다를 것이 없다고 아도르노는 말하고 있다.


따라서, 계몽과 신화는 변증법의 형태로 시대에 따라 변화해 온 것에 불과하며
이것의 배후에는 '이성'의 힘을 과신하는 우리의 '사고체계'가 있다는 것이다.

[출처] 나무위키 -테어도어 아도르노-


말하자면 신화에서 이성으로 계몽된 것이

오늘날 오히려 그 반대 즉 이성이 신화로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성이 아도르노의 시대에는 '나치'에 해당하는 것이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서는

바로 `미국의 대표적인 오락 문화`라고 아도르노는 말하고 있는데

이는 미국뿐만이 아닌 전 세계의 공통적인 현상일 것이다.


아도르노는 이를 `문화 산업`이라 부르며


할리우드 영화 등을 생각하면 알 수 있는 것처럼
문화가 산업이 되어 `획일성`에 따라 제품을 만들어 인간을 규격화해 간다.

[출처] 현대 철학 로드맵 -arte 출판-


고 비판하면서


오락적인 문화는 자발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는 우둔한 인간을 만든다.

[출처] 현대 철학 로드맵 -arte 출판-


라고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아도르노는

계몽의 특질을 도구적 이성이라고 주장하면서


도구적 이성은

자연의 개체에서 이질적인 것을 제거하고
모든 것을 양으로 환원하여 계산 가능성을 토대로 자연을 지배한다.

[출처] 현대 철학 로드맵 -arte 출판-


고 말한다.



도구적 이성은 다시 개개인에게서 주체성을 빼앗고
대체 가능한 표본으로 바꾼다.

[출처] 현대 철학 로드맵 -arte 출판-


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파시즘과 문화 산업에서 작용한 도구적 이성이 사람들을 지배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구성되어진 세계를 아도르노는 `관리된 세계`라고 말하며


이처럼 `관리된 세계`에서는

개개인의 특질 차이는 제거되고 전체에 따라 `일원적으로` 지배를 받는다.

[출처] 현대 철학 로드맵 -arte 출판-


라고 주장한다.


중세 시대의 신화 곧 종교에서 해방되어

근대 시대의 이성으로 다가옴으로써 인간의 자유를 찾았다고 생각했지만

현대 시대에 이르러 신화 곧 종교에 버금가는 새로운 물결이 탄생한 것이다.


이 새로운 물결이 사람들을 광신적으로 이끌어 그 새로운 물결을 맹신토록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새로운 물결은 다름 아닌 손에 쥐고 있는 핸드폰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핸드폰 없으면 어떻게 되는지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도르노가 말한 문화 산업뿐만이 아니라

현재 우리는 모든 면에서 이성이 부지불식간에 잠식당하고 있는 것이다.


무언가 모르는 것이 있으면 바로 핸드폰을 찾고

친구들과 어디서 모일지 장소를 정할 때도 핸드폰을 찾고

자동차를 타고 운전할 때도

요리를 할 때도

음악을 들을 때도

게임을 할 때도

집 안의 가스밸브를 잠글 때도

집에 홀로 있는 강아지를 지켜볼 때도

글을 쓸 때도 등등


우리들은 핸드폰을 찾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이성은 이제 편안하게 핸드폰이 안내해 주는 대로

따라 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문화 산업이 우리를 우둔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생활 산업'이 우리를 우둔하면서 `똑같은 인간'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관리된 세계'에 스스로 종속되고 있는 것이다.


은하철도 999에서 주인공 철이가 어느 별에 도착했는데

그 별의 사람들이 모두 같은 모습인 것처럼 말이다.


구글 이미지 -은하철도 999 동일한 인간-
구글 이미지 -은하철도 999 동일한 인간-
구글 이미지 -은하철도 999 동일한 인간-


물론 순기능도 있음은 부인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삶을 더 윤택하게 해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핸드폰의 이러한 혜택을 넘어선 그 무엇이

사람들을 종속시키고 부품화, 도구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바로 그 무엇이 '나치'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그래서 사람들의 이성이 도구적 이성이라고 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에리히 프롬이 말한 것처럼


강력한 지도자에게 복종함으로써
고독과 무력감을 해소하려고

[출처] 현대 철학 로드맵 -arte 출판-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실 강력한 누군가가 하라는 대로 하면 무척 편한 것은 사실이다.

또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도 강력한 그 누군가가 직접 해결해 주니까

'나'는 생각할 필요도 없고 걱정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나의 평생 골칫거리인 먹거리를 해결해 주니 얼마나 속이 편하겠는가.


물론 누군가가 하라는 대로 하게 되면 하기 싫은 것을 해야 할 때도 있겠지만

그래도 적어도 그 강력한 누군가가 하라는 대로 그저 하기만 하면

먹고살 걱정은 안 해도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함정이 드러난다.


'나'가 걱정 없이 먹고살게 해주는 대신
'나'가 하기 싫은 것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어쩌면 죽음까지도 무릅쓸 수도 있을 정도로 말이다.

말하자면 자살특공대 같은.


아니면 `이 정도 수준이면 됐지 않느냐`고 말하면서

`이 정도 수준 이상은 바라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면서 달랠지도 모른다.


이처럼 강력한 지도자에게 복종하는 것은 이런 함정이 숨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함정이 있어도 만족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각자의 선택일 것이고 그 선택에는 각자가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먹고사는 문제는 늘 `딜레마`에 빠지게 한다.
결국 선택의 문제이다.


성경에 `넓은 길로 가지 말고 좁은 길로 가라`고 하는 것처럼

이 선택이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다.








keyword
이전 09화[칼럼] [강압적 복종 VS 자발적 복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