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지의 `장점`과 `단점`을 동시에 보여줘야 하는 이유
장자크 루소는
1712년 태생의 스위스 제네바 공화국 출신이다.
프랑스의 사회계약론자이자 직접 민주주의자, 공화주의자, 계몽주의 철학자이다.
저서로 <사회계약론>, <인간 불평등 기원론>, <에밀> 등이 있다.
[출처] 위키백과 -장자크 루소-
루소는 자신의 저서 <사회계약론>에서 `일반의지`를 주장하는데
`일반의지`는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합의가 되려면 구성원 전체의 힘을 움직이는 정당성을
소수의 선택에 두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선택에 두어야 하는데 그렇게 결정한 `공동체의 선택`
[출처] 나무위키 -장자크 루소-
을 말한다.
쉽게 말하면 다수결에 의해 선택된 `공동체의 선택`을 `일반의지`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다수결에 따라 대통령을 선택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각 개인들의 마음속에서 공익을 추구하는 마음이 사라지면
그럴수록 점점 더 그 '투표에서의 다수결'은 일반의지라고 말할 수 없게 된다.
[출처] 나무위키 -장자크 루소-
고 루소는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일반의지`는 이상적인 `진리`같은 보편적인 개념을 뜻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유토피아와 같은 사회에서 행해지는 선택이라든지
천국에서 행해지는 선택 같은 완벽한 그 무엇을 가리키는
곧 우리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그런 사회를 위한 선택을 말하는 것이다.
계속해서 루소는
각 개인들의 마음속에서 공익을 추구하는 마음이 사라지면
그럴수록 점점 더 그 '투표에서의 다수결'은 일반의지라고 말할 수 없다면서
일반의지는 언제나 바르지만, 일반의지를 인도하는 판단이 언제나 밝은 것은 아니다.
국민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게 해야 하고, 때로는 보아야만 하는 방식으로 보게 해야 한다.
국민이 찾고 있는 바른길을 보여 주어야 하고, 개별 의지의 유혹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해야 한다.
공간과 시간을 가로질러 보게 해야 하고
쉽게 인지되는 현재 이득의 유혹과 숨겨져 있는 먼 해악의 위험을 저울질해 주어야 한다.
[출처] 나무위키 -장자크 루소-
고 말하고 있다.
즉, 선택에 있어서 눈앞에 있는 나의 이익이 아니라
장기적인 미래의 우리 모두의 이익까지 추구하도록 일깨워 줄 `안내자`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일반의지`에는 한 가지 결정적인 문제가 있다고
루소는 말하고 있다.
한 사람의 마음속에서 사적인 이익과 공적인 이익을 분리시키는 것은 가능하지 않으며
개인이 공익을 내세우면서 사익을 챙기는 투표를 한다면
공익을 향한 모두의 마음인 '일반의지'라는 개념은 아무 쓸모없게 된다.
[출처] 나무위키 -장자크 루소-
며 `일반의지`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래서 루소는
`시민들의 가슴속에 새겨져 있는 풍습, 관습, 여론`의 중요성을 강조
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사람이 사람으로서의 도덕 곧 양심에 따라 선택하고 결정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처럼 루소는
우리는 진심으로 법과 정의를 사랑하고
필요한 경우 의무를 위해 생명을 희생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며
그 내용이 담긴 신조는 단순해야 하고 분명하게 진술되어야 하며 무엇보다도 관용적이어야 한다.
[출처] 나무위키 -장자크 루소-
고 말한다.
이러한 공동체의 선택 또는 다수의 선택은
밴드웨건 효과라는 편승효과가 작용하고 있는 것을 무시할 수 없다.
밴드웨건 효과Bandwagon Effect는
개인의 결정이 다수의 선택을 따라가는 현상
을 말하는데
경제적으로는
`이번 시즌 마지막 세일`, `두 번 다시없을 기회`,
`오늘 방송만을 위한 한정 구성` 등등
소비자를 현혹시키는 문구들
[출처] 나무위키 -편승효과-
로 인해 충동구매를 하는 것이고
정치적으로는
선거를 앞두고 사전 여론 조사나 유세 운동 등을 벌였을 때
특정 정당 및 후보가 절대적인 우위를 차지하면
'저 정당/후보가 우세할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는 유권자들에 의해 지지율이 쏠리는 현상
[출처] 나무위키 -편승효과-
을 말한다.
다수가 따라간다고 해서 `밴드웨건 효과`가 잘못된 선택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다수를 따라가는 것도 그 사람의 선택이고 자유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다수의 결정이 언제나 옳은 것이냐`이다.
여기서 다수의 결정의 척도를 잘 될 것이라는 판단보다
혹시라도 나타나게 될 다수의 결정에 의한 피해의 규모에 따라서 판단하는 것도
옳은 선택을 하기 위한 발판이 될 것이다.
말하자면
사회 또는 국가 전체의 이익을 위한 것이냐 아니면
한 사람 또는 한 집단을 위한 것이냐
에 따른 피해 규모를 예측해 보는 것이다. 옳고 그름이 아니라.
왜냐하면 사회 또는 국가를 위한 것이라고 해도 항상 옳은 것은 아니고
한 사람 또는 한 집단을 위한 것이라고 해서 항상 잘못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 또는 국가를 위한 선택이라면 피해 규모가 작을 것이고
한 사람 또는 한 집단을 위한 것이라면 피해 규모가 클 것이다.
그러면 선택의 여지는 한 가지밖에 없게 된다.
어떤 선택이 피해가 적을 것이냐를 기준으로 판단하면 될 것이다.
물론 더 복합적인 요소가 있기에 단순히 피해 규모만으로 판단하는 것이
완벽한 방법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옳은 방향으로는 안내해 줄 것이다.
어쨌든 우리 사회는 다수의 선택에 따라서 움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A, B, C의 세 가지 선택지 중에서 다수가 B를 선택했다고 하자.
그러면 모든 사람들이 B라는 선택지를 위해 합심하여 계획하고 움직여야 한다.
만일 선택지 B의 결과가 좋으면 B의 선택지대로 계속 가는 것이고
이때 A와 C를 주장한 사람은 자신의 주장을 수정 보완하면서
다음 기회를 바라보고 선택지 B의 방향에 적극적으로 동참해야 한다.
그러면서 B에 의한 부작용을 최소화하도록 생각하고 조언해야 한다.
만일 선택지 B의 결과가 좋지 않으면 A와 C의 선택지 중에서
한 번 더 다수의 선택에 의해 결정하고 움직여야 한다.
이때 B를 주장한 사람은 망설임 없이 다음 선택지를 위해 길을 터주어야 한다.
혹시라도 선택지 B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다면 다음 기회에 다수의 선택에 맡기는 것이다.
이렇게 선택지 A, B, C를 놓고 선택함에 있어서
위에서 말한 것처럼 존중과 양보와 겸손이 있어야 할 것이다.
또한 다수의 선택이 큰 역할을 하기도 하겠지만 그 책임 또한 크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결과가 좋지 않음에도 과정과 동기가 좋지 않냐고 반문하는 것은 어리석은 질문이다.
왜냐하면 이 선택은 한 개인이나 한 집단만의 선택이 아니라 전체를 위한 선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정과 동기 그리고 결과는 동전의 양면으로써
그때그때의 판단이 중요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여기서 위정자와 지식인들의 혜안이 빛을 발해야 한다.
나의 선택지만 고집하는 행위는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만일 A라는 선택지에 의해 수행해 온 동기와 과정이 좋은 결과를 기대할만했는데
예상치 못한 경우의 수 때문에 결과가 나쁘게 나왔다면
꼭 B와 C로 선택지를 변경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한 번 더 A라는 선택지를 추진해도 될 것이다.
그런데 이것 역시 다수의 선택에 맡겨야 한다.
이렇게 논의하고 보니 이제 정말로 필요한 것은
다수가 옳은 선택을 하도록 하는 안내자 역할이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이 `안내자`는 그 선택지에 대해
그 선택지의 `장점`도 안내하고
그 선택지의 `단점`도 안내해야 한다.
두 가지 다 보여주어야만 다수가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 현실에서는 선택지가 모두 장점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한쪽 면만 보도록 만들고 있으니 사회가 똑바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한쪽 면만 보도록 한다는 것은 사회나 국가의 전체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개인 또는 집단의 이익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저울의 추가 한쪽으로 쏠려버리는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장점과 단점을 모두 보여주는 이런 안내자가 없다.
모두가 확증편향으로 밴드웨건 효과를 누리려고만 하고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떤 선택지의 양면 곧 장점과 단점을 동시에 보여주는
`안내자`가 나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