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이 이방인이 되고 있는 이유
알베르 까뮈는
1913년 태생의 프랑스의 작가, 언론인이자 철학자이다.
저서로 <이방인>, <페스트>, <시지프스의 신화>, <칼리굴라>, <반항하는 인간> 등이 있다.
[출처] 위키백과, 나무위키 -알베르 까뮈-
요즘 부모님이 지병으로 오랫동안 앓으시다가 돌아가신 경우
장례식장의 분위기는 먹구름의 요소와 한줄기 빛의 요소를 느낄 수 있다.
부모님을 떠나보낸 아쉬움과 슬픔과 탄식이 있지만
그보다 더 큰 것이 살아계신 부모님을 돌보는 것에서의 탈출이다.
돈에서의, 시간에서의, 육체의 피곤함에서의 탈출이
부모님의 죽음보다 더 큰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자녀가 편찮으신 부모님으로부터의 탈출을 더 반겨서가 아니라
이 사회의 구조가 만들어낸 것이다.
하루하루 바쁜 일과 속에서 늘 쫓기며 살고 있는 현대인은 이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슬픔보다 돈과 시간과 육체의 피곤함으로부터 만들어진 무덤덤함과
모든 사람은 죽는다는 당연함과 내일 또 일하러 가야 한다는 피곤함과 불안감이
현대인들을 엄습하는 것이다.
그렇게 현대인은 `이방인`이 된 것이다.
뫼르소가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보여준 그 무덤덤함이
오늘날 현대인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것이다.
장례식이 끝나고 나서도 슬픔보다는 그 무덤덤함이 계속되고
하루하루의 일상을 아무 거리낌 없이 살아가는 것이다.
만일 부모님의 죽음을 계속해서 슬퍼하고 있다면
주변 사람들은 유난스럽다고, 도덕적인 체한다고 여길 것이다.
그냥 부모의 죽음에 대해서 아무런 회상도 소회도 없이
나의 일상을 계속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
바로 `이방인`과 무엇이 다른가 말이다.
저 옛날 부모님 사후에 삼년상을 어떻게 치렀을까?
요즘처럼 삼일장으로 장례식을 끝내는 현실에서
3년이라는 시간은 요즘 시대에는 거의 무한의 시간이나
다름없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지도 못할 것이다.
만일 사회 구조가 삼년상을 치르는 사람들을 위한 체계가 있다면
일단 일하지 않아도 먹을 수는 있을 것이고 3년 후의 일자리도 보전되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3년 동안 부모님과의 과거를 돌아보고
웃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할 것이고
사진도 보고 동영상도 보면서 부모님을 그리워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삼년상의 기간 동안 이와 같이 하지 않을 것이다.
사회적인 체계가 있더라도 말이다.
삼년상은 부질없는 짓이기 때문이다.
실은 삼년상은 그저 사진과 동영상을 보면서 육체적으로 편안하게 보내는 것이 아니라
삼년상은
인간이 태어나서 3년이 되어야만
부모의 품을 떠날 수 있다는 의식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즉 삼년상에는 적어도 3년이 될 때까지는
살아있는 부모를 모시듯 돌아가신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돌아가신 부모를 위해 일체의 행동을 삼가며 상복을 입고 지냈으며
부모상을 당하면 관직을 그만두었고
장례 이후에는 묘소 옆에 여막을 짓고 탈상 때까지 생활하였다고 한다.
이 기간에는 술과 고기를 먹을 수 없으며, 아내와 잠자리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출처] 한국민속대백과사전 -삼년상-
그냥 3년이라는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품을 떠나기 위한 과정이며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해 효도까지 해야 한다는 것이다.
관직까지 그만두고 말이다.
이렇게 삼년상을 보내게 된다면 현대인에게는 인고의 시간을 넘어
나락으로 떨어지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그냥 사진과 동영상을 보고 과거를 회상하는 것만으로도 삼년상을 치르기 힘들 텐데 말이다.
그런데
인간이 태어나서 3년이 되어야만 부모의 품을 떠날 수 있다는 의식은
지금도 한 번쯤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부모로서의 자격이 없는 철없는 부모들이 많기 때문이다.
사실 나를 포함하여 우리 모두가
부모로서의 자격이나 의무와 책임 같은 것들에 대해서
제대로 배우거나 깊게 생각한 적이 없을 것이다.
살면서 시간이 해결해 주든지 아니면 그냥 넘어갔을 것이다.
그래서 어린 부모들의 사건, 사고가 뉴스에 많이 나오는 것이다.
아직 부모의 품을 떠날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인 것이다.
부모의 품을 떠나서 제대로 된 부모가 되기 위한 교육이 따로 있어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회사에 입사하면 신입교육을 받는 것처럼
결혼을 하면 의무적으로 부모교육을 받는 제도를 한 번 고민해 볼 필요가 있겠다.
뫼르소가 '햇빛이 눈이 부셔서' 아랍인을 살해했다고 말을 하는데
현대인들도 이와 다를 바가 전혀 없다.
갑자기 기분이 나빠져서 옆 사람을 *** 하는 경우가 빈번히 발생하고 있지 않은가.
사회 구조에 의해
사람들이 어딘가에 마음을 두지 못하고 불안감을 안고 살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것 하나에도 마음을 두지 못하는 현대인들은
부모에게조차 마음을 두지 못하고 떠돌고 있을 뿐이다.
오로지 'ㄷㆍㅡ ㄴ'만 쫓고 있는 것이다. 모두들 그렇게 하니까 말이다.
'ㄷㆍㅡㄴ' 외에는 모든 것이 무심하고 무덤덤하기 때문에
뫼르소가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른다.
[출처] 이방인 -알베르 까뮈-
고 말한 것이다.
이렇게 마음을 둘 곳이 없는 현대인들은
햇빛이 눈에 부셔서
[출처] 이방인 -알베르 까뮈-
상상하지 못할 일들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뫼르소는
교도소에서 항소도 포기한 채 집행일 만을 기다리면서
어머니의 삶에 대해 생각하며 시간을 보내게 된다.
마지막에는 교도소의 부속 신부가 찾아와 그에게 죄를 털어놓을 것을 권하지만
뫼르소는
신부의 위선적인 면을 꾸짖고
자신의 죽음이야말로 진실되고 그것이 자신의 삶을 증명한다며 거부한다.
[출처] 나무위키 -이방인-
이에 신부는 뫼르소의 비정상적인 면모를 보고 불쌍한 인간이라 말하며 떠난다.
신부의 입장에서 뫼르소가 죄를 자백하면 사형을 면할 수 있기에
죄를 인정할 것을 권했을 것이다.
하지만 뫼르소 입장에서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이방인`이기에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여 이 낯선 곳을 벗어나는 것이
낯설지 않은 `우리`로서의 삶을 선택하는 길이였을 것이다.
혼자 남은 뫼르소는 마침내
어머니의 삶과 세상의 애정 어린 무심함을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출처] 나무위키 -이방인-
자신이 가장 바라는 것은
처형되는 날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증오를 퍼붓는 것이라며
그렇게 해서 자신의 이야기가 완벽하게 마무리되고
자신이 혼자라는 느낌을 최대한 덜 받게 된다.
[출처] 나무위키 -이방인-
라고 말한다.
어쩌면 뫼르소는 현실의 무심함과 무덤덤함 속에서
누군가 자신을 알아봐 주기를 갈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인정`을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인정`을 갈구하기 전에 내가 마음을 둘 곳을 찾는 것이 더 중요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