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변신 VS 배수의 진]

우리가 배수의 진을 쳐야 하는 이유

프란츠 카프카는

1883년 태생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유대계 소설가이다.

저서로 <변신>, <심판>, <성城> 등이 있다.

[출처] 위키백과 -프란츠 카프카-

900%EF%BC%BFScreenshot%EF%BC%BF20250730%EF%BC%BF232152%EF%BC%BFGoogle.jpg?type=w966 구글 이미지 -프란츠 카프카-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가 어느 날 아침 벌레가 되었다.

그레고르는 집안의 경제적인 모든 것을 맡고 있었다.


벌레가 된 자신을 보면서 그레고르가 생각한 것은


이 모습으로 어떻게 일하러 가지?


였다.


벌레가 된 자신을 치유할지가 아니라 일을 하러 갈 생각을 한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가 숨겨둔 돈을 꺼내왔다.

그레고르는 배신감을 느꼈다.


그레고르는 가족이 먹고살도록 온 힘을 기울여서 일을 하고

심지어 여동생의 학비를 위해서 희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레고르가 일을 못 하게 되자

가족들은 제각기 일자리를 찾을 생각을 그제야 하게 된다.


그러고는 각자 나름대로 먹고살 수 있을 정도의 돈을 벌어온다.


그런데

가족들이 벌레인 그레고르의 음식을 챙겨주는 것에서 힘겨움을 느낀다.

가족 모두가 마음속으로 저 벌레가 죽기를 바라고 있다.

드디어 벌레인 그레고르가 죽자 드디어 가족들은 안도의 한숨을 쉰다.


카프카는 주인공을 벌레로 묘사했지만

만일 큰 병에 걸렸거나 장애를 얻었다고 했어도 그 과정과 결말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살면서 정말 나락으로 떨어져서 '배수의 진'을 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라면 사람들은 합심하게 된다.

가족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그래서 한 가지 목표에만 몰두하게 된다.

그 목표는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또는 민주주의를 위해서 또는

나의 먹거리를 위해서 인 것이다.


궁지에 몰린 쥐가 뒤돌아보며 덤비는 것과 같다.


그런데 사람들은 함부로 '배수의 진'을 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해결해 주기 때문이다.


그 누군가는 지금 내 옆에 있는 든든한 그 누구이다.


만일 지금 바로 내 옆에 있는 든든한 그 누구가 없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당장 지금 하고 있는 낭만적인 것을 그만두고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몸을 던질 것이다.


그레고르 가족이 그렇게 했다.


그레고르가 그토록 힘겹게 일하면서 가족의 안위를 위해 돈을 벌어올 때도

가족들은 무언가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아들이, 오빠가 돈을 벌어오니

부모든 동생이든 스스로 무언가를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아마 그레고르가 벌레가 되기 전에 돈 벌어 오기가 힘들다고 말했다면


무슨 소리 하느냐
네가 일하지 않으면 우리는 모두 죽는다.


고 말하며 그레고르를 죄책감에 들게 할 것이다.


아니면 그레고르가 벌레가 된 후에


가족들 먹여 살리기 위해
힘들어도 참고 일을 해 왔었다.


고 말하면


왜 지금 말하냐, 진작에 말하지


라며 책임을 그레고르에게 돌릴 것이다.


미리 말했으면 이런 힘든 상황까지는 안 왔을 거라는 말이다.

그레고르의 희생과 상황과 생각을 외면한 채 말이다.


이렇게 그레고르의 주변 사람들은 자신의 편함과 안위를 위해
그레고르를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에게 유익하면 그레고르를 칭찬하고
자신에게 불리하면 그레고르를 비난할 것이다.


어쩌면 그레고르로 살아가면서 겪는 어정쩡한 힘듦이

힘들다는 말조차도 못 하게 하고 있기에

책임감 있는 그레고르의 삶을 계속 힘들게 하고 있는 것이다.


차라리 벌레가 된 것처럼 확 무너져서 `배수의 진`을 치지 않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더라면

그레고르는 벌레가 되지 않고 영웅이 됐을 것이다.


부모와 동생은 그레고르가 얼마나 힘들게 돈을 벌어오는지 알고

그레고르를 존중했을 것이다.

현재 우리가 본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나락에 떨어져 `배수의 진`을 친 사람들의 이야기인 이유와 같다.


나락에 떨어져 `배수의 진`을 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은

죽음을 앞둔 상황일 것이기에 말이다.


이처럼 그레고르가 `배수의 진`을 미리 쳤어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삶의 힘듦을 견디고 있었기 때문에

벌레가 되었고 또 벌레로서의 대우를 받게 된 것이다.


나락에 떨어진 사람은 오로지 한 가지 목표밖에 없다.

바로 '삶'이다. 아니 '사는 것`일뿐이다.


그런데 그 '삶'이 아니 '사는 것일 뿐인 삶'이 지금 우리의 '삶'이다.


그런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산 사람은 살아가는 모든 체제에 맞춰 살아가야 하기에 말이다.


철학자가 무슨 말을 하든

사회학자가 무슨 말을 하든

경제학자가 무슨 말을 하든

문학자가 무슨 말을 하든

예술가가 무슨 말을 하든

위정자가 무슨 말을 하든.


어쩌면 `삶` 아니 `사는 것일 뿐인 삶`은
항상 `배수의 진`을 펼치도록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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