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이렇게까지 누려야 하는가?
오노레 드 발자크는
1799년 태생의 프랑스의 한 작가이다.
그는 소설가, 극작가, 문예 비평가, 수필가, 언론인, 인쇄업자였다.
프랑스 혁명 이후 프랑스인들의 삶을 다룬 인간극이라는 작품을 썼다.
이는 무려 약 90여 편에 달하는 소설들을 하나의 시리즈 형태로 묶어놓은 것이다.
저서로 <사라진>, <샤베르 대령>, <고리오 영감> 등이 있다.
[출처] 위키백과, 나무위키 -발자크-
정열적인 청년 조각가 `사라진Sarrasine`은
오페라 극장의 프리마 돈나 `잠비넬라`를 열렬히 사랑한다.
조각가인 `사라진Sarrasine`은 `잠비넬라`를 보고
양팔과 상반신의 연결부에서 느껴지는 모방할 수 없는 우아함,
기품 있는 목의 매끈함, 눈썹과 콧날이 빚어내는 조화로운 선, 완벽한 타원형의 얼굴,
또렷한 윤곽의 순수함, 넓고 육감적인 눈시울 아래 휘어진 짙은 속눈썹의 효과를
[출처] 사라진 -오노레 드 발자크, 민음사 출판-
감탄하고 감탄했다.
이 뜻밖의 창조물에는 세상 모든 남자의 넋을 빼앗고도 남을 사랑과
한 사람의 비평가를 사로잡을 매력이 넘쳐났다.
[출처] 사라진 -오노레 드 발자크, 민음사 출판-
고 발자크는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잠비넬라`가 `카스트라토`였다.
`카스트라토`는
카스트라토castrato는 거세가수를 말한다.
변성기 이후 음역이 내려가는 것을 막고 여성의 음역을 내기 위해 거세한 가수로
여성의 소프라노의 음을 낼 수 있다.
카스트라토는 비잔티움 제국에서 거세당한 환관들이 노래를 불렀던 것에서 시작했다고 한다.
남성의 육체에 여성의 목소리를 가진 자
즉 신의 목소리에 가장 닮았다는 믿음으로 카스트라토가 생겼다는 이야기도 있고
중세 유럽에서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고린도전서 14장 34절을 잘못 해석한 비극으로 인해 카스트라토가 생겼다는 이야기도 있다.
카스트라토의 전성기는 18세기였다.
이탈리아에서만 해마다 6000여 명의 소년이 거세당했으며
대표적 카스트라토인 파리넬리도 이 시기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카스트라토가 모두 성공하지는 않는다.
대부분 실패한 카스트라토들이고 이들은 주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하지만 파리넬리나 카파렐리, 세네지노 등
성공한 카스트라토도 적지 않으며, 이들은 최고의 인기와 부를 누리며 살아갔다.
또한 하이든도 목소리가 고와서 성가대에서 노래를 부르다가 거세될 뻔했으나
부친의 만류로 카스트라토가 되는 것을 벗어났다고 한다.
나폴레옹이 이탈리아를 점령한 후부터 카스트라토 생성을 금지했다고 한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아직도 성행하고 있었으며,
그러나 거세에 대한 비윤리적 문제가 제기되었고,
결국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는 1903년에 공식적으로 금지시켰지만
시스티나 성당에서는 아직도 카스트라토를 고용하고 있었으며
20세기까지 카스트라토가 있었다고 한다.
최후의 카스트라토는 20세기 초반까지 있었다.
그리고 그 최후의 카스트라토는 알레산드로 모레스키(1858∼1922)이다.
[출처] 위키백과 -카스트라토-
`잠비넬라`가 `카스트라토`인 것을 알고 `사라진Sarrasine`은
그녀 아니 그를 찾아와 화를 내고 슬퍼하는 과정에서
`잠비넬라`의 후원자인 추기경의 부하들에 의해 살해당한다.
`파리넬리` 역시 `카스트라토`이다.
파리넬리는
1705년 태생의 18세기에 유명했던
이탈리아의 카스트라토 혹은 소프라니스트이다.
목소리의 극대화를 위해 거세하였다.
본명은 카를로 브로스키인데 그의 후원자였던 '파리나' 형제의 성을 본떠 만들었다고 한다.
[출처] 위키백과, 나무위키 -파리넬리-
카스트라토의 천상과 같은 목소리를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그 당시의 성경에 의해 여자들은 교회에서 조용히 지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정말로 말하고 싶은 것은
인간들이 이렇게까지 해서라도 누려야 하는가?
이다.
도대체 인간들이 뭐라고
고음의 영역을 듣기 위해서
여자들이 교회에서 노래를 부를 수 없으니
남자들이 변성기를 거치기 전에 고환을 제거해 고음을 내도록 하는
한 인간을 무시하고 무너뜨리는
이런 발상 자체가 너무나 놀랍고 속된 말로 미친 생각이라고 말하고 싶다.
저 천상의 목소리는 도대체 누가 듣기에
한 인간의 고유한 영역까지 제거하면서 누리려고 하는가 말이다.
물론 자연과 우주가 자신의 존재를 알아주길 바라는
그 어떤 존재를 바랐기에 인간이 탄생했을지라도
이 인간이 자연과 우주의 흐름을 거스르면서까지
인간 자신을 위한 어떤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
지금 인간들은 과학기술에 의해 자연과 우주에 월권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도 자연과 우주가 그나마 눈감아 주고 있을 뿐이다.
조금만 더 그 경계를 넘어간다면 자연과 우주는 참지 않을 것이다.
지금 그 징조가 보이고 있지 않은가.
지금 이 상태에서 멈추고 자연과 우주에 나타난 부작용을 치유해야 한다.
또한
인간이 또 다른 인간에게 행한 그 부당함으로 나타난 `부작용`도 치유해야 하고
인간 스스로가 자신에게 행한 그 `도덕적 해이`도 치유해야 한다.
언젠가 유튜브를 통해서 중국의 영화관의 모습을 보게 되었는데 가관이었다. 부사는 빼겠다.
물론 이럴 수 있고 괜찮다고 보시는 분들도 계실 것이다.
식당에서 훠궈 끓여먹으면서 대형 TV 보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고 말이다.
하지만 영화관에서 음식을 끓여 먹는 행위는 지나치게 `누리는` 행위이다.
대형 TV를 보는 곳은 집이고 가족들만 있는 공간이지만
영화관은 여러 사람이 함께 있는 공간이다. 나만의 공간이 아니다.
만약 음식으로 인해 불상사가 발생한다면
의자를 뒤로 밀어 피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바닥이 평평하지 않고 오르막이어서 무언가 굴러떨어져서 발생하게 될 어떤 불상사를
예측하기도 불가능하고
뛰쳐나갈 수 있는 공간도 옆 사람이 막고 있어
그 사람이 나가야 나갈 수 있는 구조이고
또 무언가 밀폐된 공간이어서 예측할 수 없는 어떤 경우가 발생할 수 있는 것처럼
식당에 비해 그 피해가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날 것이다.
불상사에 의한 피해도 문제지만 더 한 것은 사람들의 `누리고 받으려는` 의식이다.
편안하게 누리려고만 하는 나는 편안해도 너는 편안해서는 안 되는
그저 남으로부터 대접받으려고만 하는
자신은 안 해도 남은 해야 하는 것과 같은 생각과 태도 말이다.
중국 영화관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나를 포함하여 우리 모두가 이런 `내로남불`식의 정신 자세에
나도 모르게 당연하다는 듯이 사로잡혀 있음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소위 `속 빈 강정`과 무엇이 다른가 말이다.
TV를 틀면 이런 `내로남불`식의 장면을 일상으로 볼 수 있으니
지금 나를 포함한 우리들이 당연하게 아니 이제는 아무런 감각도 느끼지 않게 되어 버린 것이다.
`카스트라토`를 양성하여 천상의 소리를 듣고 감격하며 눈물을 흘렸던 자들이
자신의 자식이 `카스트라토`가 되겠다고 한다면 `그래 장하다`라며 반겼을까 보다.
이런 의식에 빠져 있는 자들이
자신이 하면 괜찮고 남이 하면 안 된다.
고 말하며 자신을 신격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모습을 보고 `발자크`가 자신의 소설
`사라진Sarrasine`을 통해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넘어 인테리어와 아웃테리어도 너무 지나치게
`누리려고만` 하는 것은 아닌지 한 번쯤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돈이면
'나'를 천상의 그 무엇으로 만들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돈이 지금처럼 한 쪽으로 쏠리지 않았다면
일론 머스크도 화성에 갈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화성에 왜 가야 하며
만일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누가 가야 하는가'가
문제가 될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화성에 갈 수 있는 '그 누구'는 도대체 누구인가?
지금의 우리 지구를 박살 내고 있는 '그 누구'가 아니겠는가.
'그 누구'는
'어떻게 해서라도 누리려는 자들'이다.
화성에 가려는 그 돈으로 지구를 살리면 될 터인데
굳이 화성에 가서 화성까지 오염시키려고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