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킹메이커>에서 현재 우리 사회를 엿보다.
영화 <킹메이커>는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김운범'(설경구)을 동경했던 선거 전략가 '서창대'(이선균)가 선거에서의 승리를 위해 전무후무한 선거 전략을 펼치는 내용이다. 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을 통해 김운범과 서창대가 각각 김대중 전 대통령과 당시 선거 참모 엄창록을 모티브로 했다는 점을 쉽게 유추할 수 있다. 하지만, 엄창록에 관한 기록이 많지 않은 만큼 이 영화는 고증을 위한 역사 영화와는 거리가 좀 있다. 대신에 김운범과 서창대의 인간적인 관계성에 집중한다.
두 주인공의 관계성을 흥미롭게 담아내는 변성현 감독의 장기는 '팬덤 몰이'를 했던 전작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에서 이미 입증된 바 있다. 변성현 감독은 <킹메이커>를 통해 자신의 특기를 한 번 더 선보이며, 가장 스타일리시한 정치 영화를 완성했다.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목적이 수단을 어디까지 정당화할 수 있는가'의 난제를 변성현만의 스타일로 현대 정치사에 녹여내, 지금까지 이어지는 비극을 그려내는 영화 <킹메이커>는 그 당시를 겪었던 세대도, 시대적 배경과 먼 세대도 재밌게 볼 수 있다.
영화는 다소 노골적인 연출로 주인공의 관계성을 친절하게 설명한다. '킹'인 (정확히는 킹이 되고자 하는) 김운범과 '킹메이커'인 서창대를 각각 빛과 그림자로 설정했고, 영화는 중간중간 이 "빛과 그림자"의 대비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김운범과 서창대가 나란히 앉아 있는데 빛이 김운범에게만 비치는 장면이나, 김운범이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고 연설을 하는 모습을 그대로 따라 하는 서창대를 겹쳐 보여주며 컷이 넘어갈 때 서창대의 그림자부터 컷이 시작되는 부분이 대표적이다. 영화에서 서창대는 대놓고 '그림자'라고 불리기도 하며, '빛이 세질수록 그림자는 더 짙어진다'는 유명한 말도 삽입되어 있다. 코로나19 영향으로 인해 여러 번 개봉이 미뤄지고, 의도치 않게 선거철에 개봉하게 된 탓에 혹여나 사람들이 자칫 색안경을 끼고 이 영화를 보게 될까 걱정되었는지 변성현 감독을 비롯하여 설경구 배우와 이선균 배우도 이 영화는 정치 영화가 아니라고 거듭 강조했던 것이 영화를 보다 보면 단번에 이해된다. 이렇게 영화는 정치적 내용보다는 빛과 그림자로 표현되는 두 인물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영화에서 빛과 그림자는 곧 목적과 수단에 대응되기도 한다. 빛의 역할을 하는 김운범이 '대의'라는 목적을 강조하고, 그림자 역할을 하는 서창대는 그 목적을 위해선 '일단 이겨야'한다며 승리를 위한 갖가지 수단의 동원을 강조한다. 이 둘의 대립은 영화의 프롤로그에서 김운범과 서창대가 처음 만나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 아자씨'로 벌이는 작은 언쟁을 시작으로 영화 후반부 김운범이 서재에서 서창대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정점을 찍고, 영화의 마지막 서창대의 상상 씬에서까지 해소되지 않은 채 평행선을 달린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의 이상적인 답은 '정당화할 수 없다'다. 그렇기 때문에 고등학교 윤리 시간에 수단이 목적을 삼키면 안 된다고 배운다. 하지만 정치는 청소년 드라마가 아니다. 순수한 정의만으로 살아남을 수 없다. 때로는 용맹해야 하고, 가끔은 여우같아야 한다. 그래서 순수한 정의를 정직하게 내세우는 용맹한 김운범에게 서창대가 여우같을 필요성을 조언한 것이다. 김운범은 대의를 목적으로 삼는 올곧은 인물이었지만 동시에 자신의 대의를 이뤄내기 위해 결국 불여우 그 자체인 서창대를 택하는 정치인이기도 했다.
즉, 정치판에서 대의를 위해서라면, 조금은 틀어진 수단일지라도 어느 정도 허용해야만 하는 상황이 분명히 존재한다. 김운범은 나름대로 (명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그 기준이 있었다. 그래서 마타도어를 일삼는 서창대를 품고 가다가도 과하다 싶으면 돌려보내기도 했으며, '왜 이겨야 하는지가 중요하다'고 몇 번이고 상기시켰다. 김운범은 '세상 돌아가는 꼬라지 좀 바꾸고 싶다'고 외치던 서창대의 순수한 목적을 기억했기에, 서창대의 그림자가 더 짙어져서 결국 그 목적을 삼켜버리는 결과만큼은 막을 수 있게 최대한 컨트롤하며 자신과 함께 가길 원했다.
이러한 김운범의 정치 방식은 순수한 이상만으로 살아남을 수 없는 정치 세계에서 꽤나 합리적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또 너무나 이상적이다. 그래서일까, 결국 김운범과 서창대는 빛이 세질수록 그림자는 더 짙어질 수밖에 없다는 빛과 그림자의 숙명에 따르다 갈라지게 되었다. 그렇게 짙어지는 그림자를 잘라낸 김운범은 빛나는 것에 실패했고, 빛을 잃은 서창대의 그림자는 소멸되었다. (마지막 서창대의 상상 씬에서 김운범을 바라보는 서창대에게도 햇빛이 환하게 비치는 것이 그것을 표현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빛과 그림자를 앞세워서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 좋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면 방향성이 잘못되더라도 눈 감아야 해요, 그래야만 언젠가 빛나게 될 거예요'를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반대로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어요. 수단이 목적보다 앞서면 망해요'를 말하는 것일까. 당연히, 둘 다 아니다. 이 영화의 제목이 빛과 그림자가 아닌 "킹메이커"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영화에서의 둘의 행적을 머릿속에서 다시 재생했을 때, 서창대가 "내가 만든 정의를 스스로 무너뜨렸다"고 말하는 장면에서 멈추게 된다. 서창대의 결말은 지금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 현재 진행 중인 현대사 속 반복되는 비극의 메타포다.
국민은 그저 구슬리면 믿고 말하면 듣고 시키면 하는 존재라고, 4.19때 자유당을 무너뜨리고 3.1운동 때 목숨을 걸어가며 만세 운동을 하던 일부의 희생이 있었다 하더라도 독재는 계속되고, 친일했던 사람들은 떵떵거리며 살고 있다고 적어도 분노할 줄은 알았던 서창대는 결국 그 분노의 대상의 편에 섰다. 비록 자신의 방법이 그들과 다를 바 없어도 '목적'만큼은 정의를 바라보았었지만, 끝내 수단과 목적을 모두 삼켜버리는 거대한 그림자가 되었다. 그렇게 길어진 서창대의 그림자가 수많은 사람들의 그림자와 겹쳐지는 장면에서, 정의를 추구했으나 갖가지 이유로 한 줌의 정의까지 다 내다버린 사람들이 스쳐 지나간다. 그리고 여전히, 목적과 수단을 모두 잃은 채 어둠의 그림자만 드리워진 상황들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비단 정치에서만의 문제가 아니다.
위 글은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59179 글을 재편집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