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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르셔 꽤 Oct 02. 2021

그 아침의 남자

그의 자동차가 내 가슴 속으로 들어왔다

좌회전을 해서 이제 막 10차선 도로에 들어선 참이었다. 평소와 달리 도로에 차가 가득했다. 내 출근길은 출근러쉬와 반대 방향이라 이런 정체는 매우 드물어서 순간 긴장이 되었다. 아침 조회에 3분 이상 늦은 아이와 방과후에 원격 자율학습을 하기로 했는데, 자칫하면 담임인 내가 지각을 하게 되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여유 있게 나왔으니 괜찮을 거야, 설마 그 정도로 막히겠어.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신호가 바뀌어서 차들이 조금씩 움직였다. 그때 오른쪽 앞에 있던 차 한 대가 눈에 들어왔다. 비상등을 켜고 다른 차보다 훨씬 느린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게 답답했는지 그 뒤에 있던 차가 내 앞으로 차선을 변경해 들어왔다. 덕분에 뒤차와 간격이 벌어지면서 그 차가 더 잘 보였다.  

    

연식이 오래되어 보이는 sm3였다. 차알못이긴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정겹고 소박한 느낌이 드는 디자인이나, 살짝 우그러진 범퍼, 뭐라고 명명해야 할지 모를 색상 등. 한 눈에 봐도 세월의 흔적이 느껴졌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유리창이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망정 하나같이 시커멓게 선팅이 된 차들 틈에서 유일하게 선팅이 되어 있지 않은 차였다. 그렇다고 또 투명한 유리도 아니었는데, 꼭 주황 물감이 한 방울 섞여든 물컵을 사이에 두고 그 차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오래 사용해서 색상이 탁해진 플라스틱 용기를 떠올리게 하는 유리창. 그래서 뒷자석 위에 올려둔 잡다한 물건들이 다 들여다 보였다.      


비상등, 느린 속도, 낡은 외관만으로도 눈길을 끌었지만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은 창문에 걸쳐 올린, 노동으로 다져진 듯한 그을린 팔이었다. 지금 이 도로의 정체 따위는 아무 문제 없다는 듯 여유로운 모습.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도로에서 다른 차들은 모두 초조해 보이는데, 유일하게 그 차만 드라이브쓰루 카페에 들어선 것처럼 자기만의 속도로 천천히 움직였다. 목적지에 언제 도착해도 상관없다는 듯 느긋하게 움직이면서 비상등은 왜 켜고 가는 걸까? 끼어들기를 했던 걸까. 비상등을 켜서 감사 인사를 전하고 그대로 둔 걸까. 그는 서둘러 다음 동작을 하는 사람이 아닌 거지. 나는 길어지는 정체를 걱정하면서도, 그를 흥미 있게 관찰하고 또 섣부르게 짐작하며 어쩐지 즐거워졌다. 출근길에 이렇게 재미있는 장면을 만나다니!      


차의 뒷자석에는 뭔가가 가득 든 큰 자루가 하나 실려 있었다. 전래동화에나 나올 법한 보기 드문 아이템이었다. 뭐가 들었을까. 저렇게 큰 자루를 어떻게 실었을까, 아마도 저 사람이 하는 일과 관련이 있겠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그 차를 지나치게 되었다. 나는 이미 그 차의 모든 것에 흥미를 느끼고 있던 터라 옆을 지날 때 놓치지 않고 운전석을 쳐다보았다. 부드러운 웨이브가 있는 짧은 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헤어스타일이 의외라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웨이브!      


이렇게 차가 막히는 때에는 다들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앞 차의 꽁무니를 바짝 따라가기 바쁘다. 더구나 출근길이라면 양보에 인색해질 수밖에 없다. 나는 3차로에서 5차로로 서서히 차선을 변경해 우회전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차들이 꼬리를 물고 있으니 미리미리 차선을 변경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내 오른편에는 자기만의 속도로 움직이는 그가 있지 않은가. 그래서 어려움 없이 자연스럽게 그 차 앞에 끼어들게 되었다. 룸미러로 보니 그는 팩에 든 흰우유를 마시고 있었다. 보통 체격에, 이목구비가 선명한 얼굴이었다. 간단하게 끼니를 해결하는 모습이 그의 살집 없이 탄탄해 보이는 팔과 어울린다 싶으면서도, 남자다운 느낌을 주는 강한 얼굴과 부드러운 우유는 어딘가 이질적인 느낌도 들었다. 신호에 걸려 서서 보니 그는 룸미러를 보며 두 손으로 얼굴을 정리하고 있었다. 손으로 볼을 털 듯이 힘있게 두어 번 쓸어내리고, 같은 방법으로 구레나룻도 쓸어주고 있었다. 얼굴에 먼지가 있을 리도 없고, 전형적인 중년 남성의 커트 길이여서 구레나룻 주변에 정리할 머리카락이 있을 것 같지도 않은데 저 큰 동작이 무슨 효과가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그를 관찰하고 있었다. 그때 그와 눈이 마주쳤다. “당신 뭐하고 있어? 왜? 뭘 그렇게 보는데?”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얼굴만큼이나 강한 눈빛이었다. 꽤 오랫동안 시선을 고정하고 있어서 순간 당황스러웠다.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잠시 후 신호가 바뀌자 급히 5차로로 차선을 변경했다. 나는 소심하니까.      


궁금하면 볼 수도 있는 거지, 은밀한 관찰자가 뭐 어때서. 민망한 마음을 스스로 도닥이면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러다 슬쩍 옆 차선을 보고는 큰 소리로 웃고 말았다. 다른 차선에는 없는 빈 공간이 그 차 앞에는 꽤나 길게 나 있었기 때문이다. 정체된 도로에 어울리지 않는 공백이 우스웠다. 정말로 그는 서두르는 법을 모르는 사람이구나. 

나는 우회전을 하기 위해 앞쪽의 차가 빠지기를 기다렸다. 그 사이 왼쪽 차선은 천천히 직진을 했고, 그 차도 내 옆을 지나갔다. 눈으로 그 차를 좇으며, 이제 곧 내가 우회전을 하면 그가 시야에서 사라지겠구나 싶어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저만치 앞서가더니 교차로에 다 가서 우회전 깜빡이를 켜는 게 아닌가. 나는 또 한 번 크게 웃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 앞까지 간 거야, 그제서야 차선 변경을 시도하면 어떡해. 과연 이 정체된 도로에서 끼어들기를 할 수 있을까. 나는 뭐든지 자기 속도에 맞춰서 하는 그 모습이 재미있어서 급히 핸드폰을 들고 그 차의 무심하고 느긋한 뒷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잠시 후 그는 어느 너그러운 운전자의 앞자리에 끼어들어 내 앞줄의 어딘가로 사라졌다. 나는 다시 가슴이 두근거렸다. 앞에 있는 버스에 가려서 그 차가 직진을 했는지, 아니면 나랑 같은 방향으로 우회전을 했는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교차로에 이르러 우회전을 했을 땐 그 차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 그게 뭐라고 왠지 아쉬워서 내 앞에 있는 모든 차들을 샅샅이 살펴보았다. 가슴이 여전히 두근댔다.      


특별한 경험이었다. 이렇게 짧은 순간 강렬한 인상을 주는 사람도 있구나. 여기서 잠깐, 나는 부드럽고 자상하고 지적이고 고운 남자를 좋아한다. 그러니까 그는 전혀 내 취향이 아니다. 눈에 띄어서, 재미있어서 관찰을 했던 것뿐인데 왠지 더 지켜보고 싶고, 어디로 가는지, 어떤 일을 하는지, 말투나 성격이 어떨지 궁금해졌다. 어떤 사람일까,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의 당황스러움과 곤란함, 두근거림이 나쁘지 않았다. 그 자체로 무척 낯설고 신선했다.      


무엇보다 재미있었던 건 내 자신이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이토록 강한 호기심과 호감을 느낄 수 있다니. 게다가 남자한테. 아니, 방금 막 떠올랐는데 그에게는 남자라는 말보다 ‘사내’라는 표현이 어울린다. 그래, 그는 낯선 사내다. 지금껏 한 번도 보지 못한 부류의 남자. 출근 정체 속에서 그 역시 조급하게 차를 몰았다면, 한껏 느긋하게 팔을 걸쳐 올리지 않았다면, 부드러운 웨이브가 아니라 전형적인 블루클럽 머리를 하고 있었다면, 우유가 아니라 레쓰비를 마시고 있었다면 그에게 이만큼의 흥미를 느끼지는 않았을 것 같다. 만약 그의 손에 레쓰비가 들려 있었다면 나는 제멋대로 다음 장면을 상상했을 것이다. 담배를 피우고, 꽁초를 캔에 쑤셔 넣고, 운전석의 문을 조금 열고 침을 뱉는 모습 같은 것들. 그러고는 뒤이어 담배꽁초가 든 캔을 보았을 때의 그 불쾌함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을지도. 그을린 피부, 낡은 차, 큰 자루에 스포츠형 머리와 레쓰비의 조합이면 뭐 어때서, 그것들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다르기에, 나는 이렇게 편협하고 낡은 사고회로를 돌려가며 그를 기꺼이 오해하고 또 솔깃해 하는가. 


멋대로 상상하며 섣불리 정의하자면 그는 ‘부드러운 상남자, 외강내유형의 사내’다. 1년 전 어느 아침에 잠시 스친 것뿐인데 좌회전을 해서 10차로에 들어설 때면, 여전히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도로를 둘러보게 하는 사람. 그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그는 반드시 예의 sm3를 타고 나타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못 알아볼 확률이 높다.) '그날 아침 그의 모습'과 내가 느낀 '낯설고 싱겁고 강렬한 호감'에 대해 주책맞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당신은 참 특별한 사람이에요. 그거 알아요?"라는 뜻으로. 

         

 

그가 시야에서 사라지기 전에 급히 당겨 찍기. 차 번호도 외워버림.




'그녀의 자전거가 내 가슴 속으로 들어왔다'라는 광고 카피가 생각날 게 뭐람. 나이든 거 너무 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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