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어쩜 저리 맑고 긍정적인가, 정말 티 하나 없는 크리스탈같구나' 싶은 사람을 만난다. 자주는 아니지만 기억에서 잊혀질 만 하면 한 명씩 만난다. 그런 사람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조금은 경이롭고, 조금은 부럽고, 조금은 불편해진다. 독일 작가 토마스 만의 「토니오 크뢰거」에는 크나크라는 춤선생이 나오는데, 토니오가 크나크에게 느낀 감정이 이와 비슷하다.
크나크 씨의 두 눈은 얼마나 평온하며 안정되어 있는가! 그의 눈은 사물이 복잡해지고 슬퍼지는 곳까지 사물을 깊이 들여다 보지 않았다. 그의 눈은 사물이 갈색이고 아름답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의 태도가 그렇게 당당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정말이지 어리석지 않고는 그 사람처럼 걸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야 사랑스러워 보이므로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
- 토마스 만, 토니오 크뢰거 중 -
토마스 만은 크나크와 같은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당당하고 유쾌할 수 있는지를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사물을 깊이 들여다 보지 않기 때문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사물의 긍정적인 측면에 주목하고 그 이상 깊이 보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우유라는 사물을 볼 때 예쁘게 거품이 생긴 맑은 흰색과 고소한 맛에만 주목하는 것이다.
크나크와 반대되는 사람도 있다. 토니오가 그렇다. 토니오는 사물을 깊게 들여다 본다. 가령 우유를 볼 때 피상적인 형태와 맛에만 주목하지 않고, 우유를 만들어 낸 젖소의 고통과 목장 주인의 근심, 수 많은 젖소들이 뀌는 방구 속에 든 이산화탄소 때문에 날로 망가져 가는 지구의 대기를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까지 깊이 생각하면, 사물의 긍정적인 면 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면도 볼 수 밖에 없다. 고로 감정도 밝기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사물을 얼마나 깊게 볼 것인가도 선택의 문제다. 크나크 같은 사람은 얕게 보면서 그 사회적 효과를 톡톡히 누릴 것이고, 토니오 같은 사람은 깊게 보면서 우주의 진리에 조금 더 다가서려 할 것이다. 전자는 현실의 절반만 보는 사람이기 때문에 생의 어느 순간에 나머지 절반한테 크게 한 방 얻어맞을 가능성이 있다. 운이 아주 좋다면 죽을 때까지 피해 갈 수도 있다. 반면 후자는 현실의 대부분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보기 때문에 다양한 부정적 감정과 깊은 외로움에 시달릴 것이다. 양으로 따지자면 전자가 더 많기 때문에 소수인 후자는 외로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크나크와 토니오 사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사물을 볼 때 너무 얕게도 너무 깊게도 보지 않는 것이다. 우유를 보면서 예쁜 색깔과 맛만 보지 않고 우유가 내포하는 다른 의미들도 살피지만, 지구의 대기가 망가져 멸망에 이르는 지경에까지 생각이 발전하지는 않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양 극단의 유혹을 항상 느낀다. 마냥 단순하게 생각하고 넘어가 버리거나, 모든 본질을 다 깨달을 때까지 한 사물에만 몰두하고 싶은 유혹. 어쩌면 인생이란 이 두가지 유혹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적절한 깊이로 사물을 바라보는 훈련의 과정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