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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보영 Sep 01. 2017

여행 중 갈등, 티격태격하다

부자여행 : 전주편 #11

한옥마을과 오목대 구경을 하고 한옥마을 뒤쪽으로 난 길을 골라 내려왔다. 


사람들은 한옥마을 앞쪽에만 붐볐을뿐 뒤편은 한산했다. 단층짜리 상점들이 즐비한 그 골목은 80년대에 시간이 멈춘 듯 보였다. 상점의 간판은 색이 바래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는 것들이 많았고 ‘수퍼’라는 이름의 상점은 유리문이 굳게 닫혀있어 어떤 상품을 파는 지조차 알 수 없었다. 몇몇 초라한 음식점만이 실내등을 켜둬서 현재 영업중임을 알리고 있었다. 유명관광지 옆에 있는 상점가에서 초라한 서민들의 일상이 낯설게 느꼈다. 어쩌면 초현대식 한옥마을의 껍데기가 진짜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애써 가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에 씁쓸해졌다. 


이곳저곳 골목길을 두리번 거리면서 우리는 숙소 옆 남부시장에 이르렀다. 이곳 남부시장은 퇴색해가는 우리네 재래시장의 하나였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공중파 방송에 이색적인 시장으로 소개되면서 하나의 관광명소로 자리잡았다고 한다. 시장 한켠의 낡은 건물 2층에 위치한 청년몰이 그곳이다. 골목골목 좁다란 길을 헤매고 찾아간 청년몰 입구에는 “레알뉴타운-이층 청년몰-적당히 벌고 아주 잘살자”라는 의미심장한 슬로건이 걸려 있다. 조금만 벌고 많이 행복하게 살자는 나만의 슬로건과 좀 비슷해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나와 비슷하게 생각하는 청년들이 많은가 보군. 2층으로 올라가는 넓은 계단 양 옆에는 웰컴이라는 환영메세지와 재미있는 상점 소개들이 있었다. 무엇이 있을지하는 기대감이 계단을 오를수록 커졌다. 


평일에다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많지 않은 사람들이 청년몰 이곳저곳을 두리번 거리고 있었다. 직사각형의 건물 옥상에 마련된 청년몰은 겹치는 종목이 없는 청년 특유의 독특한 사업아이템을 갖고 있었다. 살거리, 놀거리, 먹거리로 채워진 이 상점들에서 진우 눈에 띤건 ‘같이놀다가게’라는 이름의 가게였다. 보드게임방으로 대부분 알고 있는 상점이름을 재미있고 기발하게 바꾼 이름이라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7살쯤부터 진우는 보드게임을 접했다. 가장 먼저 한 것은 진우 태어나기 전부터 아내와 나와 즐기던 루미큐브였다. 1부터 13까지 적혀있는 네 가지 색깔의 숫자카드를 번호대로 혹은 같은 색깔끼리 내려놓아 자기 손에는 아무 카드도 없게 만드는 게임이다.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한 규칙에다가 나름대로 두뇌를 가동시켜야 승리할 수 있는 게임이라 인기가 많았다. 텔레비전이 없어 심심한 아이들에게 최고의 놀잇감임에 분명하다. 7살이 된 진우한테 이 게임을 시켜줬더니 정말 좋아하고 잘해서 가끔 집에서도 즐겼다. 진우에게 보드게임은 익숙한 놀잇감이었다.


어쩌면 여행은 낯선 공간과 만나는 것이다. 익숙한 것보다 새로운 것들이 많기 때문에 때로는 두려움도 있고 거부감도 있는 것이 여행이다. 그래서 여행을 한다는 것은 용기냄을 배우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곳에서 만난 익숙함에 진우는 금방 빠져들었다. 청년몰의 이색적인 가게들이 주는 신선함은 온데간데 사라졌다. 보드게임이 하고 싶어진 것이다. 집에서 하던 게임들이 진우 눈을 붙들더니 접하지 못했던 새로운 게임들이 진우를 매료시켜 버렸다.


“아빠. 보드게임하고 가요”


이미 해는 졌고 밤은 늦었다. 보통 집에 있을 때 이 시간이 되면 하루일과를 마무리하기 위해 치카(양치)를 하고 세수를 하고 낮에 보지 못한 그림책을 읽었다. 하지만 우리는 여행을 왔으니 일상의 시간과 다른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일단 나는 진우에게 너무 늦었으니 안되지 않겠냐고 했고 진우는 괜찮다고 했다. 나는 보드게임은 집에 가서도 충분히 할 수 있으니 그것보다는 다른 곳에 가서 새로운 것을 보는 게 어떻겠냐고 했고 진우는 집에서 할 수 있는 보드게임은 몇 개 되지 않는데 여기에는 새로운 게임들도 많으니 꼭 여기서 해야겠다고 했다. 나는 이미 시간이 늦었고 게임을 하다보면 더 늦어질거라고 했고 진우는 딱 한 판만 하자고 했다. 나는 여행에 왔으니 여행을 즐겨야지 구석진 곳에 틀어박혀 게임만 하기엔 시간이 아깝다고 했고 진우는 상관없다고 했다. 우리는 대립했다. 

아까까지 좋았던 우리 여행에 불길한 먹구름이 몰려들었다. 솔직히 게임을 해도 상관은 없었지만 보드게임하는 시간이 무척이나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내 주장을 강하게 몰아부쳤다. 안돼. 이거보다 재미있는 거 많을거야. 어서 가자. 하지만 진우는 움직이지 않았다. 입만 앞으로 쭉 내밀고 침묵시위에 들어간 것이다. 강하게 안되면 회유라도 해야하지 않겠는가. 오늘 보드게임 안하고 집에 가면 새로운 보드게임을 사주겠노라 약속했다. 내 말은 이미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래 간단하게 한판하고 나오자. 원칙과 규칙에 어긋나지 않는 일에서 아이의 의견을 들어줄 수 있으면 들어주는 것이 사태 해결의 가장 빠른 길이라는 걸 이미 몸으로 체득한 나는 진우의 의견에 따르기로 했다. 이 또한 여행의 즐거움일테니까. 가벼운 실랑이를 마치고 게임방의 문을 열자 진우의 기분은 급반전되어 싱글싱글거렸다. 하지만 그 기분은 단 1분도 가지 않았다.


게임방은 테이블 네 개만 놓여있는 좁은 가게였고 그나마도 이미 사람들이 모두 차지하고 게임에 몰두하고 있었다. 주인분한테 얼마나 기다려 게임을 할 수 있겠냐고 물었지만 돌아온 대답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식당처럼 음식을 다 먹으면 자리가 나는 시스템이 아닌 것이다. 자리가 나는 걸 예측할 수는 없다. 당장이라도 날 수 있지만 오늘 중으로 나지 않을수도 있다. 이 모든 상황을 진우가 직접 눈으로 보고 있었다. 게임을 할 수 있는 자리가 없다는 불가항력적인 상황에서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알겠습니다고 문을 닫고 나왔다. 시무룩해진 진우는 터벅터벅 내 뒤를 따랐다. 그러면서 한 마디.


“집에 가면 보드게임 사주시는 거에요”


아까 내가 내걸었던 조건이 떠오른 모양이었다. 하지만 내 대답은 “아니”였다. 그 조건은 게임을 하지 않았을 때였고 지금은 상황이 변해버렸으니 사줄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칫, 아빠 나빠” 뒤통수에서 들려온 진우의 뽀로통한 푸념이 들려왔다. 여행에서 벌어진 갈등은 외적 조건에 의해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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