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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보영 Jan 03. 2018

우리는 '시' 읽는 가족입니다

부자여행:춘천편#12

맷방석은 진우가 얼마전에 외운 신경림의 동해바다에 등장하는 물건이었는데 사실 맷방석이 무엇인지 나도 잘 몰랐었다. “친구의 티끌만한 잘못이 맷방석만하게 보일 때가 있다”는 그 맷방석이 얼마나 큰 건지 감을 잡지 못했었는데 실물을 보니 그 크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티끌이 저렇게 크게 보인다면 얼마나 크게 느꼈졌던 것인지 말이다.

우리 가족은 작년부터 매주 한편의 시를 외운다. 그동안 외운 시가 40여 편에 달한다. 황조가, 하여가, 단심가처럼 짧은 시에서부터 김춘수의 꽃, 윤동주의 서시, 신경림의 동해바다처럼 긴 시까지 한 주에 한 편씩 외우고 시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작가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국문학을 전공하고 시와 소설을 좋아하는 아내가 매주 일요일 저녁에 선정한 시를 공개하면 우리는 경쟁적으로 시를 외운다. 시를 외우면서 시에서 이야기하는 내용을 상상하고 시의 맥락이 갖는 의미를 파악한다. 선정된 시를 가장 먼저 외우는 사람은 이제 막 아홉살이 된 진우다. 그 다음이 일곱살 연우고 내가 맨날 꼴찌다. 일요일에 선정된 시는 다음주 일요일까지 다 외워야 하는데 보통 진우는 그날 저녁이면 이미 다 외워 버린다. 그런 다음 아이들은 시를 노래처럼 흥얼흥얼거린다. 시가 곧 노래라는 말을 아이들을 통해서 배웠다.

이렇게 시를 외우고 흥얼거리다 보니 아이들은 어느새 즉석에서 시를 짓는 수준에 이르렀다. 진우가 지은 시 중에 재미있는 시 한편을 소개하고 싶다. 이 시는 지난 추석 명절 때 파주에서 안동의 외갓집에 내려가면서 진우가 지은 즉흥시다. 


제목 : 정수 

지은이 : 최진우


1급수와 2급수는

그냥 먹거나 약간의 정수처리를 거친 후

마실 수 있고 

3급수와 4급수 그리고 5급수는

복잡한 정수처리를 거쳐야만

마실 수 있다 


운전하면서 진우가 낭송하는 이 시를 듣고 큰 웃음이 터졌다. 시의 라임도 좋고 운율도 맞아떨어지는 듯한 느낌에 무엇보다 귀에 쏙 들어왔다. 그리고 듣는 나도 금방 외워버릴 정도였다. 어디서 이런 생각을 해냈는지 진우에게 물었더니 학습만화에서 봤다고 했다. 진우만이 아니라 둘째 연우도 즉흥적으로 시를 쏟아냈다. 아이들은 이미 시를 읽고 낭송하는 데에서 벗어나 시를 갖고 놀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우리 가족은 텔레비전이 없고 아파트에 사는 것이 아니라서 어찌보면 놀거리가 없다하지만 그것들은 정형화된 놀이이거나 아니면 일방적인 유희일 뿐이다내면에서 우러나는 즐거움이 크지 않다그래서 아이들은 늘 재미없어 하면서도 재미있는 놀이를 찾아 즐긴다아이들의 놀이를 유심히 지켜보면 돌멩이 하나 나뭇가지 하나도 여러가지 다양한 놀이 소재가 되는 것을 알 수 있다아이들은 이미 자신만의 상상력과 협업을 통해 이 세상 하나뿐인 놀이를 마음껏 즐기고 있었다시를 외우는 것도 놀이처럼 했기 때문에 가능했으리라 생각한다국어논술학원의 딱딱한 책상에 앉아 외우라고 했으면 과연 몇 편이나 외웠을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학습은 놀이여야 하고 놀이는 그냥 놀이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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