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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보영 Jan 15. 2018

인천 배다리헌책방과 노부부

부자여행:인천편#10

뜻밖의 선물에 우리는 들떴다. 배다리헌책방 골목은 동인천역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전철이 지나는 길 아래로 뚤린 굴다리를 지나면 이내 배다리헌책방 거리가 나온다.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대부분 헌책방은 문을 열지 않았다. 썰렁한 골목길이었지만 아침햇살은 따뜻했다.


배다리는 원래 배가 닿던 곳이라는 뜻이란다. 지금의 인천 동구 금창동과 송림동, 중구 경동 일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1883년 개항한 이후 일본인과 청국인들로 인해 개항장에서 터전을 잃어버린 조선인들이 이곳 배다리 주변에 모여 마을을 형성한 것에서 유래한다. 이후 서울로 가는 통로인 이곳에는 하나 둘 좌판이 늘어가면서 시장이 되었다. 특히 새학기가 시작되는 봄이 되면 교과서를 싼 값에 구하려는 학부모와 학생들이 헌책방에 모여들면서 지금의 헌책방 거리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배다리헌책방거리라 이름 붙인 이곳은 인천 지역을 대표하는 헌책방 골목이다. 몇 해 전 문화거리 조성의 하나로 대대적인 미화작업이 있었다고 하지만 우리가 찾았을 때는 따뜻한 날씨에 비해 을씨년스러운 모습이었다. 아침 이른 시간이라 그런게 아니라 이제는 과거의 명성만큼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곳이었다.


이른 아침에 문을 연 작은 헌책방에 들어갔다. 가로 3미터 세로 10미터가 안되는 아주 협소한 책방이었다. 뒤쪽으로 문이 있어서 안채와 연결되는 모양이었다. 우리가 들어갔을 때는 할아버지 한분이 우리를 반겨주었는데 우리가 책을 고르는 사이 할머니도 나오셨다. 할아버지 아침 지금 자실거냐는 퉁명스러운 대화가 오갔다. 적어도 오십 년 이상은 같이 사신 분들 같았다. 말투에는 무신경함이 툭툭 떨어졌지만 그 뒤에는 부부 사이의 오래된 관습같은 게 묻어나왔다.


문을 연 다른 책방은 없어보여서 이곳에서 책을 좀 읽을 요량이었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 서점은 규모도 작았고 책도 적었는데 그나마 있는 책들도 철지난 자격증과 중고등학생들 문제집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런 책들을 누가 사간다고 구비해 뒀는지 의아했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대화가 더이상 이어지지 않는 틈을 타 말을 걸었다.


“여기 헌책방들이 많이 없어졌나봐요?”

“그렇지. 예전만 못하지 뭐.”

“오는 사람들은 더러 있어요?”

“요즘엔 오지도 않아. 맨날 이래”

“그런데도 일찍 열고 계시네요”

“허허. 일어나면 그냥 여는거지. 집이 여기 뒤거든”

“소일삼아 이렇게 나오시는 거세요? 그래도 그냥 편히 쉬시지 그러세요”

“놀면 뭐하나. 이렇게 나와있는 게 편해. 이걸로 평생 살았는데”


이렇게 시작된 대화는 한참을 이어갔다. 중간중간 할머니도 말씀을 거들어 주었다. 삼십 년도 더 된 이 집에서 책방하면서 애들 키웠다는 말씀이셨다. 그 시절 참 못 먹고 못 입고 하던 때였다. 누구나 그랬다. 그렇게 힘들게 살면서 아이들 키우고 대학보내고 시집장가 보내는 것이 그분들의 희망이자 낙이었다. 누구나 그랬다. 누구나 그렇게 살아왔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의 삶에서는 언제나 보람이 느껴졌다. 노력하면 조금이나마 보상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있는 나라였다. 미약하나마 정의라는 게 있었다. 굳이 지금과 비교해보고 싶지는 않다. 멀지 않은 미래에는 특히 우리 아이들이 주역이 되어 살아갈 세상은 우리 어르신들이 살았던 세상만큼만이라도 정의로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부부는 나와 진우를 돌아보며 여행 중이냐고 물으셨다. 나는 그렇다고 했다. 할머니는 진우가 어른스럽다며 칭찬해 주셨다. 그러면서 또 자신의 과거로 돌아간 눈빛으로 말씀을 이어갔다. 애들 데리고 서울 구경하고 동물원 간 이야기 그리고 개천가에서 물놀이하던 이야기를 어제 있었던 일처럼 들려주셨다. 내게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들끼리 하는 이야기였다. 낯선 우리들의 등장이 그 노부부를 젊은 시절의 한 순간을 떠올릴 수 있게 해드린 기분이었다. 덧붙여 할머니는 우리에게 아니 나에게 되도록이면 아이들과 함께 좋은 시간을 많이많이 보내라고 당부했다. 지금이야 본인의 아이들은 장성하고 결혼해서 나가 살지만 자기들은 여기 남아 옛 추억 떠올리면서 살아간다고 말이다. 추억을 곱씹고 곱씹고 곱씹으면서 그렇게 그 두분은 노후를 서로 채워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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