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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보영 Jan 19. 2018

수학여행 일번지, 경주

부자여행:경주편#02

내가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닌 곳은 경주다. 


우리 세대에게 경주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몇 개 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수학여행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집과 부모님을 떠나 친구들과 오롯이 추억을 만들 수 있는 공식적인 여행. 국민학교 6학년, 중고등학교 2학년 때 가는 수학여행은 한국사람이라면 누구나 멋진 추억의 한 장면쯤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그 추억의 장소가 되었던 곳이 경주였다.


가을이 되면 내가 살던 경주에는 참 많은 관광버스가 들이닥쳤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찾아드는 수학여행 학생들로 경주시내는 들뜬 분위기가 되곤 했다. 하지만 정작 우리는 경주가 뭐가 좋다고 맨날 여기만 오느냐며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소위 날라리라 분류되는 친구들은 타지에서 온 같은 학년 친구들과 맞짱을 뜨러 그들의 숙소 인근을 배회하기도 했고 괜찮은 여학생들이 없나하고 하교길에 그 주위를 맴도는 친구들도 있었다. 식당이나 숙박시설은 호황이었고 경주 시내는 활기가 돌았다. 수학여행의 계절이 오면 경주시민은 각자의 방식으로 수학여행객들을 맞아 준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경주를 찾지만 정작 우리의 수학여행에는 경주가 없었다. 대신 우린 봄 가을에 있는 소풍 때면 경주 이곳저곳을 다녔다. 나중에 대학에 들어와 경주가 집이라고 대답하면 사람들은 너희는 수학여행 어디로 다니냐는 질문을 가끔 들었다. 그러면 난 사실대로 서울에 온다고 했다. 그러면 사람들은 놀란 듯한 표정을 지으며 서울에 뭐가 볼 게 있다고 서울까지 수학여행을 오느냐며 한심한 듯 반문하기도 했다. 난 속으로 경주같은 깡촌에 수학여행이랍시고 내려오는 서울 사람들이 더 이해가 안갔었다. 하지만 그 때는 경주가 어떤 곳인지 잘 몰랐다.


경주는 신라천년의 고도라는 미사여구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다. 굳이 세계유네스코 문화유산이라는 덧말까지 붙일 필요도 없이 경주는 여전히 역사의 도시이자 아름다운 문화가 살아 숨쉬는 곳이다. 대학 입시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책을 읽고 역사를 접하면서 경주에 대해 더욱 깊이 알게 되었다. 그곳을 떠나자 그곳의 진가를 알게 된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경주가 아무리 커다란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내게 경주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온전히 담고 있는 곳이라는 점이 더 크다. 서울에서 태어나 아버지의 직장 때문에 경주로 이사한 것은 열 살이 되는 해 2월이었다. 지금의 진우가 아홉 살이니까 그 맘 때의 내가 정든 학교 친구들과 헤어져 낯선 곳으로 온 것이다. 3학년 1반에 배정된 나는 새로운 친구들을 만났고 서서히 그들과 친해졌다. 아이들이 친해지는거야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지만 그 때 내가 느낀 이질감 중에 가장 컸던 것은 사투리였다. 서울말과 경상도말의 어색함으로 난 친구들과 말을 섞을 때마다 조심스러웠다. 아무렇지도 않게 썼던 서울말이 그곳에서는 물과 기름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도 점점 경상도 경주사투리에 익숙해 졌고 친구사이에서 거리낌 없이 지냈다. 학교에서는 사투리를, 집에서는 서울말을 쓰는 이중언어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가끔 학교 친구들이 우리집에 놀러와 내가 부모님이나 형들과 서울말로 이야기하는 걸 보고 신기해 했던 친구들도 있었다.


경주에서 소중했던 내 추억은 고등학교 3학년 졸업식으로 끝이 났다. 대학 진학 때문에 서울로 올라오면서 경주 친구들과 연락도 뜸해졌고 서로 왕래도 적어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경주와의 인연도 멀어졌다. 나중엔 아버지가 퇴직하시고 서울로 보금자리를 옮기셔서 경주에 갈 일이 아예 없어져 버렸다. 대학을 졸업하고는 중간중간에 결혼식과 상가집에 가는 일을 빼고는 내려갈 일이 사라진 것이다. 그렇게 떠난 경주가 벌써 20년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경주를 떠난 지 올해로 딱 스무 해가 되었다. 진우의 만화책이 아니었다면 아마 이번 여행을 떠올리지 못했을 것이다. 아내는 몰라도 나는 그 만화책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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