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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보영 Jan 22. 2018

무한인내의 버스이동

부자여행:경주편#03

이번 출발지는 고양시외버스터미널로 정했다. 


다행히 서울까지 가지 않더라도 고양에서 출발하는 경주행 버스가 있었다. 아침을 든든히 챙겨먹고 전철을 타고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평일 오전 경의선 전철 안은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들이 주로 서울 방향으로 나가고 계셨고 여행가방을 든 초등학생은 진우밖에 없었다. 진우는 경의선 노약자석에 앉아 밖을 둘러 보고 있었다. 전철이 역에 정차해 승객들을 태우고 출발하려는 순간 진우가 어떤 할아버지에게 자리를 양보하려고 일어섰다. 다른 곳의 빈자리는 없었다. 자리를 양보받은 할아버지는 진우를 보며 물었다.


“아빠랑 어디 가나보구나?”

“네”

“어디가는데?”

“경주요”

“경주? 오호 좋은 곳에 가는구나. 아빠랑 같이 가서 좋겠다. 어허 기특하다.”


할아버지와 진우의 대화는 금방 주변의 노약자석 어르신들의 관심을 받았다. 어떤 할아버지는 똘똘하게 대답하는 진우를 보고서는 도리어 “아빠가 현장교육을 잘 시키는 것 같다”며 나를 칭찬했고 “아빠랑 여행 다녀서 좋겠다”는 말씀을 진우에게 슬쩍슬쩍 던졌다. 자리 하나 양보했을 뿐인데 진우는 기특한 아이로 나는 아이교육을 잘 시키는 좋은 부모가 된 것 같아 우쭐해졌다.


전철은 곧 우리를 도착지에 내려주었고 우리는 처음 가보는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고양터미널은 타지역과 연결된 노선이 많지 않아서인지 터미널도 작았고 사람들도 적었다. 한산한 터미널에서 경주행 표를 두 장 끊었다. 시간이 조금 남아 진우에게 화장실을 다녀오라고 했다. 고양에서 경주까지는 공식적인 이동시간만 네 시간 반이다. 중간에 휴게소에 들르겠지만 두 시간이나 지나야 가능한 일이다. 진우에게 기차와 버스가 다른 점을 이야기해 주고 미리 화장실을 다녀오게 한 것이다. 진우는 내 설명 중에서 휴게소를 좋아했다. 휴게소에 가면 라면을 사달라고 했고 뽑기를 할 거고 과자도 살 거라고 했다. 모처럼의 여행이니 난 진우의 요구를 넓은 마음으로 수용해 주었다. 일탈이 시작된 것이다.


여남은 명을 태운 고속버스는 고양을 출발해 서울 북부지역을 빙돌아 경기도 여주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막히는 서울을 관통하지 않고 돌아가더라도 우회하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그 사이 차창 밖 풍광은 끊임없이 바뀌었다. 출발하자마자 진우는 책을 펴들었고 우리는 말없이 책을 읽었다. 그러는 사이 나는 잠이 들었다. 얼마나 갔을까. 진우가 나를 깨워 심심하다고 놀아달라고 한다. 버스는 기차처럼 돌아다닐 수도 없고 둘이 게임을 할 정도로 넓지도 않다. 나는 진우에게 책을 읽거나 잠을 자는 게 좋겠다고 하면서 다시 잠을 청했다. 하지만 진우는 낮잠을 자는 아이가 아니었다. 무료하고 심심한 두 시간을 잘 참은 우리는 마침내 꿈에 그리던 휴게소에 도착했다.

버스기사는 휴게소에서 머무는 시간을 15분으로 못박았다. 15분. 일단 우리는 버스에서 내려 화장실을 다녀온 후 식당에 들어가 라면을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 서두르진 않았지만 늑장을 부린 것도 아니었는데 시간은 벌써 7분이 지나 있었다. 라면은 아직 나오지도 않았다. 휴식시간이 10분이 되어서야 우리 라면이 나왔다. 그야말로 폭풍흡입을 하고 있는데 진우는 천천히 라면맛을 음미하고 있었다.


“진우야. 너 라면 그렇게 먹다가 버스 놓쳐. 어서 먹어.”

“시간 없어요?”

“응. 근데 꼭꼭 씹어 먹어야 된다”

“…”


그 때부터 진우는 라면을 마시듯 먹었다. 면은 씹지도 않고 식도로 곧장 입장했고 뜨겁던 라면은 금방 사라졌다. 진우가 라면을 다 먹은 시간은 우리가 버스에서 내린지 15분이 막 지난 때였다. 그렇게 먹으면 무슨 맛이 나냐고 천천히 먹으라고 했지만 진우는 라면보다 버스를 놓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더 컸나 보다. 하지만 라면도 무시하지 못하니 뜨겁더라도 맛이 덜 느껴지더라도 먹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 진우의 폭풍흡입 덕분에 우리는 버스 출발 시간에 늦지 않았다. 진우가 좋아하는 뽑기도 못하고 과자도 못사고 버스에 돌아왔는데 정작 버스기사가 오지 않은 것이다. 대략 휴게소에서 20분 정도를 정차한 버스는 다시 고속도로를 달렸다. 나는 또다시 정신없이 꿈나라로 달렸다. 진우는 내가 정신없이 자는 동안 책을 봤거나 밖을 봤거나 혹은 아무것도 안했거나 했다. 사실 진우가 이 때 뭘 했는지 난 잘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진우가 혼자서 참았다는 점이다. 참는다는 것은 싫어하는 일을 하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다. 아인슈타인은 천재란 무한히 참아내는 사람이라고 정의할 정도로 잘 참는 것을 어떤 영역에서 최고가 될 수 있는 조건으로 꼽았다. 진우야 천재는 아니겠지만 진우의 장점 중에 하나는 잘 참는 것이다. 힘든 인고의 과정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있는 아이였다. 언젠가 힘들게 참아야 했던 시기가 몇 번 있었는데 진우는 잘 참아냈고 그 끝에서 울음을 터트린 적이 있다. 버스를 타고 목적지까지 가는 거야 달리 할 일이 없으니 참을 수밖에 없었겠지만 그래도 짜증 한번 내지 않고 잘 참아준 진우가 대견스러웠다.


버스는 무심한 듯 경주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해 우리를 내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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