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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보영 Jan 23. 2018

아빠의 첫사랑

부자여행:경주편#05

경주는 경주역을 기준으로 동쪽에는 관광지가 모여있고 서쪽에는 주택지와 상업지가 모여있다. 


경주는 지역 특성상 고층건물의 건축에 제약이 있다고 했다. 지역 전체를 문화재로 봐야 할 정도로 경주의 이곳저곳은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땅이라 다른 지역보다 다소 강한 규제가 적용된 듯하다. 경주시민들은 이것이 지역발전에 장애가 된다고도 하지만 경주는 로마처럼 역사와 문화로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살던 곳은 서쪽으로 가면 나오는 주택가에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조금 달리다 보면 북천이라는 작은 강이 나온다. 이 강을 따라 올라가면 국민학교 5학년 때 떠난 내 첫 여행지의 목적지가 나올 것이다. 그리고 다리를 건너면 곧바로 내가 다닌 중학교가 있다. 오늘의 첫 목적지는 내가 살던 곳이므로 이곳은 그냥 지나쳤다. 인도가 협소하고 가게에서 내놓은 물건들로 자전거를 타기에 위험했다. 그렇다고 아이에게 도로를 주행하라고 할 수는 없었다. 보행자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천천히 안전하게 주행했다. 그나마 인도도 금방 끝나 차도와 인도의 구별이 없는 길이 이어졌다.


중학교가 시작되는 곳부터는 내 어린 시절 추억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곳들이 즐비했다. 중학교 뿐만 아니라 중학교 건너편에서 수퍼를 운영하던 친구집, 오락실 주인 아들집, 양념치킨집을 하던 친구네 집 골목을 들어가면 친구녀석들이 자취하던 셋방들, 우리만의 아지트가 되었던 친구집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는 내 첫사랑이 살던 집이 있었다.


국민학교 5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그 친구는 나보다 키가 한 뼘이나 더 컸었다. 작은 눈에 안경까지 끼고 있어서 눈은 더 작게 보였지만 동글동글한 얼굴형에 오똑한 코와 예쁜 입술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 해 여름방학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당시엔 방학 기간 중에 학교에 나와야 하는 날이 하루 있었다. 비상소집이었나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어쨌든 하루를 나가 그냥 놀다가 오면 됐었다. 지루한 방학이라 오히려 그날이 기다려질 정도였다. 그 날 학교를 갔더니 그 친구가 내게 편지 한 장을 수줍게 건네주고 사라졌다. 그 편지는 그냥 안부를 묻는 평범한 내용이었던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마지막 글귀는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 글은 


“보영이를 좋아하는 은주가”


였다.


이성에 대한 호기심이 그다지 없던 시절이었다. 이 편지를 받은 이후에야 그 친구가 여자로 보였던 것 같다. 그 전에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여자로 보였던 이성친구는 기억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 편지를 수 백 번도 더 읽었다. 누군가가 나를 좋아한다는 기분이 그렇게 좋은 줄 몰랐다. 부모님의 사랑도 잘 몰랐었을 그 때 내 또래 이성친구가 내게 준 좋아한다는 표현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그 편지를 시작으로 그 친구와 나는 자주 편지를 썼고 서로의 안부와 관심 그리고 잡다한 것들을 공유했다. 국민학교 5학년 때부터 시작된 우리의 편지 왕래는 6학년을 거쳐 중학생이 되어서도 계속 되었고 중학교 3학년 여름에 끝이 났다. 고등학교 입시가 남아있던 때였다. 좋은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공부에 방해가 되는 것들을 중단할 때라고 생각했었나 보다. 그 친구가 먼저 제안했고 그걸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중단된 우리의 편지왕래는 다시 시작되지 못했다. 그 친구는 원하던 고등학교보다 낮은 학교를 진학했고 그 학교는 경주 외곽에 있었다. 평일에는 야간자습이 12시까지 있던 때였고 일요일과 공휴일을 제외한 모든 날에 학교에 가야했다. 그 친구도 힘들었고 나도 힘들었다. 서서히 우리는 각자의 생활에서 서로를 잊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의도적으로 길을 그렇게 잡은 건 아니지만 낯익은 친구들의 집들이 끝나는 지점에 그 친구의 집이 있었다. 아니 그 집이 그 친구의 집이었다고 생각했다. 골목도 많이 바꼈고 새로운 빌라들이 지어져 방향도 위치도 제대로 잡을 수 없었다. 그냥 이 어딘가가 그 친구의 집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진우에게 잠시만 있어 보라고 하고 길 가운데 서서 잠시 옛 집들의 지붕들을 살펴보았다. 허사였다. 20년도 훨씬 지난 집을 찾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냥 마지막으로 한 번 보고 싶었다.


이 이야기는 경주에 다녀와서 아내에게 하지 않은 이야기다. 아무 것도 아닌데도 괜히 말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 아직도 첫사랑을 간직하고 있지는 않다. 첫사랑은 그렇게 아련한 맛이 있어야 하지 않느냐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고보니 고등학교 때 길거리에서 잠깐 본 걸 제외하고는 한 번도 본적이 없으니 인연이 아니긴 아니었나 보다.


다시 자전거에 올랐다. 거기서 우리집은 자전거로 2분이면 가는 곳이다. 내 기억에는 우리집 주변에는 주택들이 별로 없었는데 지금은 3층, 4층으로 된 빌라들이 빽빽히 들어 차서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빌라들 틈 사이로 드디어 옛날 내가 살던 조그만 아파트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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