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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보영 Jan 24. 2018

아빠의 국민학교와 학교 앞 문방구

부자여행:경주편#07

수위 아저씨게 감사 인사를 드리고 아파트 정문을 나섰다. 


이제 아빠가 다니던 국민학교를 가기로 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밥을 먹고 학교 갈 시간이 되면 아랫집이나 윗집의 동생들이 우리집 앞에 와서 형아 학교가자아~ 외쳐댔었다. 그러면 엄마는 봐라 동생들은 벌써 준비 다하고 나왔다면서 준비를 재촉했다. 어찌 그리들 빨리 하고 나오는 지 귀찮기도 했고 신기하기도 했다. 그래도 동생들이랑 같이 학교가는 길이 재미있었다. 큰형은 중학생이었고 작은형은 나와 두 살 터울이라 같이 학교를 다녔다. 물론 등교만 같이 했다. 학교만 갔다하면 작은형은 만날 수가 없었다. 가끔 내가 준비물을 잊고 등교하면 형을 찾아가 빌리곤 했는데 그때 외에는 학교에서 형이 필요했던 적은 없었다.


우리 아파트에서 나는 골목대장격이었다. 나보다 나이 많은 형들이 몇몇 있었지만 그 형들은 밖에서 놀지 않아서 내가 주로 어린 동생들이랑 밖에서 놀다보니 그리 된 것 같다. 대장이라고 해봐야 그냥 어울려 다니는 무리 중에서 제일 나이가 많다는 것뿐이었다. 그래도 애들 데리고 몰려다니며 장난도 많이 치고 달팽이며 잠자리며 잔뜩 잡아다가 갖고 놀 때는 내가 제일 형이라 용감하게 먼저 만지고 괜찮다고 안심시켜 주는 역할을 해야 했다. 난 아직도 벌레를 싫어하는데 그때는 괜히 용감한 척했던 것 같다.


그런 아이들을 데리고 학교를 다녔다. 요즘이야 아파트 단지 안에 초등학교가 있을 정도로 학교와 집이 가깝고 자동차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들이 많이 갖춰져 있지만 그 때는 그런 것도 별로 없었다. 우리 집에서 학교까지는 대략 걸어서 10분이면 도달하는 거리지만 어릴 때 기억으로 그 거리는 멀었다. 그리고 학교까지 가장 빠른 길로 간 것도 아니어서 중간중간 길에서 놀다보면 언제나 더 오래 걸렸다.


학교까지는 두 개의 횡단보도를 건너야 했다. 가는 길에는 몇몇 주택들과 상점들이 있긴 했지만 대부분 공터가 많았다. 길가에 핀 코스모스가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 땐 예쁜 줄도 모르고 꽃잎을 따면서 놀았다. 주위의 모든 것들이 장난감으로 보일 때였다. 요즘은 봄이면 화훼농원에 가서 예쁜 꽃모종을 사다가 마당 한 편에 심기도 하니 나도 많이 달라지긴 했나 보다. 어쨌든 내 인솔 하에 아이들은 안전하게 학교까지 갔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그 당시 아주머니들이 나한테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하는 허무맹랑한 생각도 해 본다. 우리 애들은 집이 시골 쪽에 있어서 걸어가려면 30분이 넘게 걸린다. 아직 진우가 어리고 거리도 멀 뿐만 아니라 건너야 할 횡단보도도 많아서 아직은 매일 차로 등교를 시켜준다. 그 부분은 학교와 가까이에 있는 아파트에 사는 게 부럽기도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언제 아이들을 등교시켜 줄 수 있나 싶어 즐기고 있다. 길어야 2년이다 하면서 말이다.


학교가 보이면 학교보다도 나를 먼저 반겨주는 곳이 있다. 학교 앞 문방구. 학교 정문 바로 앞에 좌청룡 우백호처럼 당당하게 서있는 두 문방구는 모든 아이들의 성지였다. 문구점 앞에는 설탕으로 만든 잉어뽑기 같은 각종 뽑기가 즐비했고 계절에 따라 어묵꼬지가 가득 꽂혀 있는 커다란 솥이 화덕 위에 걸려 있거나 설탕과 소다로 만드는 국자(서울에서는 이걸 뽑기라고 했다)를 만들 수 있는 연탄불이 놓여 있었다. 아이들은 문구점의 문구들도 좋아했지만 문구점 앞에 놓여있던 사행행위를 자극하는 놀이들에 더 열광했다.


학교 정문은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게 서있었다. 학교를 들어서면 넓은 운동장이 우리를 맞았다. 그런데 모래와 자갈들이 섞여있던 흙운동장은 온데간데없고 마법융단을 깔아놓은 것처럼 우레탄으로 트랙을 만들고 인공잔디로 축구장을 만든 운동장이었다. 우리가 찾았을 때엔 교복을 입은 중학생으로 보이는 친구들과 초등학생 꼬마들이 운동장 한쪽에 만들어 둔 놀이터에서 놀고 있었다. 학교 건물은 4층이었고 상당히 길었다. 내가 다닐 때만 하더라도 2층이었고 한 층에 교실이 여덟 개 정도씩 있는 아담한 건물이었는데 세월에 따라 학교도 자라났는지 길쭉한 모습이었다. 졸업앨범으로 보던 그 학교가 아니었다. 어딘지 모르게 낯설게 느껴졌다.


4학년 때 장난치다가 선생님께 걸려서 벌로 청소를 했던 화장실 건물은 사라져 버렸고 그 자리엔 체육관이 들어서 있었다. 보물찾기 하듯 헤집고 다녔던 학교 쓰레기 소각장도 마찬가지로 사라졌다. 당시 학교 교사 두 채만 덩그렇게 있었고 나머진 모두 우리들의 놀이터였는데 그런 공간들 대신 육중한 건물들이 들어선 것이다. 수도권 일부는 운동장도 없는 학교가 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점차 아이들에게서 흙을 빼앗아 가는 기분이었다. 아파트에서도 학교에서도 더이상 흙을 밟거나 만질 수 있는 곳이 적어지고 있다. 아까 들렀던 옛 우리집에서 느꼈던 감성을 이곳에서는 느낄 수 없었다. 그 옛날 첫사랑의 아련함이 여기에선 떠오르지 않았다.


그 사이 진우는 놀이터에서 놀면서 또래들과 친해진 듯하다. 도서관을 가자니까 좀 더 놀다 가자고 아우성이다. 진우에게 시간을 더 주고 놀이터 옆 벤치에 앉아 회상에 잠겼다. 그래도 이곳에 오니 옛 친구들이 보고 싶어졌다. 나도 어릴 때는 진우처럼 저기서 저렇게 놀았는데 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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