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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보영 Jan 26. 2018

아빠의 시립도서관, 도서관은 놀이터

부자여행:경주편#08

아쉬움을 뒤로 하고 학교를 빠져나왔다. 


가을 해는 이미 짧아지고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도서관으로 향하는 길은 옛날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상가와 빌라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다. 큰길만 옛날처럼 남아 도서관으로 향하는 길을 알 수 있게 해주었다.

이곳 국민학교가 내 국민학교 시절의 대부분을 보낸 곳이라면 지금 가는 도서관은 중학교 시절의 대부분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 중학교 1학년과 2학년 때는 야간자습이 없었기 때문에 학교를 마치고나면 갈 곳이 없었다. 아니 갈 곳은 친구집에 가거나 집에 가거나 아니면 도서관에 가는 일 뿐이었다.


황성공원 내에 자리 잡은 이 도서관은 규모 면에서도 상당히 컸던 기억이 있다. 열람실도 굉장히 넓었고 위치 상 학생들뿐만 아니라 인근의 주민들도 많이 이용했다. 우리 엄마도 이곳에 있던 많은 소설책들을 섭렵하셨다. 당시엔 도서관 열람실을 이용하려면 50원의 이용료를 내고 표를 사서 들어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긴 한데 그때는 그게 당연했으니 달리 할 말은 없다.


내가 도서관을 이용한 건 순전히 공부를 목적으로 한 것은 아니었다. 좁은 집에 다섯 식구가 있는 것도 복잡했고 숨통이 막히는 기분을 느꼈던 사춘기 소년이었기 때문에 도서관은 일종의 탈출구였다. 엄마한테 놀러간다고 하면 씨알도 안먹히지만 도서관 간다고 하면 칭찬까지 해주셨다. 놀러가는 도서관인데도 말이다. 그렇다 내게 도서관은 놀러가는 곳이었다.


그런데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하루 24시간 꼭꼭 붙어다니는 우리 가족은 아빠가 일하러 서울에 나가면 엄마랑, 엄마가 일하러 서울에 나가면 아빠랑, 도서관은 우리 가족이 하루도 빼먹지 않고 놀러가는 곳이다. 학교 바로 옆 어린이도서관이 바로 그곳이다. 집에도 적지 않은 책이 있지만 아이들은 도서관에 가서 책 읽고 노는 것을 좋아한다. 오전 아홉 시에 등교해서 한두 시면 끝나 집으로 돌아오면 아이들은 심심해 하는 경우가 많은데 다행히 아이들이 도서관에서 책 읽는 걸 좋아해 거의 매일 도서관으로 향한다.


난 도서관은 우선 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편한 도서관에서 읽고 싶은 책을 읽고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펴는 것. 그래서 아이들이 책을 좋아하고 독서를 즐겁게 여길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 도서관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예전에 미국의 어느 대학 도서관에 갔을 때 놀랐던 장면이 있다. 그 도서관은 바닥에 러그가 깔려 있어서 바닥이 폭신폭신했는데 출입문을 통과하고 그 안에서 책을 읽는 학생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책꽂이 중간중간에 테이블과 의자도 있었고 쇼파도 있었는데 그냥 바닥에 털썩 주저앉거나 아예 쇼파에 엎드려 책을 읽었다. 어느 누구도 제지하지 않고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조용조용 대화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토론용 공간이 열람실 옆에 따로 마련되어 토론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최근에 어린이도서관이 많이 개관하면서 우리나라 어린이도서관에서도 신발을 벗고 들어가 바닥에 앉아 책을 볼 수 있는 곳이 많이 생겼다. 이 년 전 애들을 데리고 그런 어린이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을 때였다. 아이들도 자유롭게 읽고 나도 배깔고 엎드려 책을 읽고 있었는데 사서선생님이 조용히 내게 다가와 한 말씀하셨다. 아이들이 보고 있으니 책을 읽으실 때는 똑바로 앉아서 읽어달라는 것이었다. 이게 무슨 뜬금없는 말씀인지 순간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나보다 나이 지긋하신 분이라 알았노라 대답하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책을 읽는 자세가 어때야 한다는 건 옛날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 아닌가. 편하고 자유롭게 책을 읽으라고 이런 분위기를 만들어 뒀으면서 똑바로 앉아서 바르게 책을 읽으라니. 다니엘 페나크는 ‘소설처럼’이라는 책에서 침해할 수 없는 독자의 권리 중에서 “아무데서나 읽을 권리”와 “소리내서 읽을 권리”를 주장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도서관에서도 자유롭게 책을 읽을 수 있는 권리가 주어져야 하지 않을까.


어쨌든 지금 아이들은 도서관을 편하게 생각하고 좋아한다. 진우와 나는 자전거를 주차시켜 두고 도서관에 들어갔다. 1층엔 어린이 열람실이 있었고 2층엔 일반 열람실이 있었는데 우린 어린이 열람실에 들어가 짐을 풀었다. 어린이 열람실은 역사와 전통의 도시 경주답게 한옥집을 연상케 하는 인테리어로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진우의 눈길을 끈 것은 만화책이었다. 쉬어갈 겸 진우와 둘이 퍼질러 앉아 책을 펴들었다. 옆에는 중학생 친구들이 수다를 떨고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한참을 책을 읽고 있는데 사서선생님께서 폐관 소식을 전했다. 아쉬워하는 진우를 달래고 도서관 밖으로 나왔을 때는 해는 이미 지고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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