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여행:경주편#09
도서관 근처엔 어묵, 번데기, 컵라면, 국수 등등 다양한 먹거리를 파는 포장마차가 있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듯 진우는 손가락으로 포장마차를 가리켰다. 도서관 앞 포장마차였지만 하루 일을 마친 어른들이 이미 자리잡고 앉아 막걸리 서너 병을 비우고 있었다. 진우와 나는 어묵 가격을 물어보고 한 개 씩 골라 입에 넣었다. 여행을 나와 먹거리를 먹다보면 지역마다 다양한 맛을 만날 때가 많지만 더러 전국의 맛이 똑같은 품목들이 있다. 어묵이 그렇다. 맛도 그렇다. 근데 또 그게 맛있다.
하나만 먹으면 아쉬운지라 한 개 씩 더 먹기로 했다. 별거 아닌데도 진우는 좋아했다. 늘 잘 먹는 아이지만 여행 중에는 더 잘 먹는 아이라 먹거리 사주는 데는 돈이 아깝지 않다. 맛있지와 맛있다를 만담처럼 나누는 모습을 본 포장마차 아주머니가 갑자기 막대과자를 두 개 건네 주었다. 한 손엔 어묵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 빼빼로를 받았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빼빼로를 주고받는 날이었나 보다. 아직 진우는 기념일을 잘 모르고 별로 의미없는 날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아주머니께 감사히 잘 먹겠다고 인사만 하고 별말 없이 진우에게 과자를 주었다. 진우도 공손하게 감사인사를 했다. 아주머니는 밝게 웃으시며
아빠랑 여행다녀?
“네. 이번이 벌써 네 번째에요”
묻지도 않은 걸 자랑삼아 이야기 한다.
“근데 이번엔 특별히 아빠 고향에 왔어요. 그리고 자전거도 타고요”
아마 이번 여행에 대해 이렇게 잘 요약할 수도 없을 것이다. 아주머니는 웃음으로 대답해 주셨다. 지금까지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 중에 내게 먼저 말을 건 사람보다 진우에게 먼저 말을 건 사람이 훨씬 많다. 많은 사람들이 아빠와 아들의 여행에 대해 관심을 가져 주었고 말없이 응원해 주셨다. 또 모든 사람들이 진우에게 친절하게 그리고 편하게 대해 주었다. 아마 진우는 여행이라는 것에 대해 상당히 긍정적인 인상을 많이 가지고 있을 것이다.
어묵 두 개와 빼빼로 한 개 씩 먹고 국물도 두 컵 씩 비운 다음에야 우리는 포장마자 주인아주머니께 인사를 건네고 황성공원을 나왔다. 시간은 많이 되지 않았지만 어두워졌다. 밤길 자전거 주행이 위험하게 느껴졌다.
다시 숙소에 들러 자전거를 세워두고 성동시장의 먹자골목을 찾았다. 내 기억에 따르면 성동시장은 웃시장이고 버스터미널 옆 시장은 아랫시장으로 불렸다. 우리집에서는 웃시장이 가까워서 더 자주 갔고 그래서 나는 아랫시장보다 웃시장을 잘 알게 되었다. 서울에서 경주로 이사하고 나서 엄마 혼자 처음 시장에 갔을 때 엄마는 아무 것도 사지 않으시고 빈손으로 돌아 온 적이 있다. 전형적인 서울 사람인 우리 엄마는 그 때까지 경주 사투리를 들어본 일도 없고 경상도 특유의 억양도 경험해 본 적이 없으셨다. 그런 분이 시장통 억센 아주머니와 아저씨들의 호객과 흥정에 겁을 드셨던 것이다. 나중에야 웃으면서 그때를 회상했지만 당시엔 얼마나 무서웠을까 싶다. 그 이후로 엄마는 왠만하면 나를 대동하고 시장에 다니셨고 나도 엄마 덕분에 시장 곳곳을 알게 되었다. 그때 시장 안 짜장면이 오백 원이 되지 않았고 시원한 콩국물 한 잔에 이백 원이었다. 그 맛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진우와 내가 찾은 웃시장 먹자골목은 그때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변해 있었다. 골목골목 들어가보니 넓게 자리잡은 식당가가 나왔다. 저녁 시간을 갓 넘었을 뿐이었는데 식당가는 한산했다. 중년의 부부로 보이는 사람 둘만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넓게 트인 공간에 일정한 공간을 바둑판으로 나눈 후 그 공간에서 음식을 판매하는 곳이었다. 진우와 내가 등장하자 식당 아주머니들은 일제히 우리에게 시선을 던졌다. 혼자 낯뜨거워져 아무데나 앉고 싶었다. 식당들은 좌판에 각종 반찬들을 수북히 담아두고 쟁반에 자기가 먹고 싶은 반찬을 덜어 먹을 수 있는 시스템이었는데 간판 이름만 달랐고 반찬들은 대부분 비슷했다. 진우는 그 중에 마음에 드는 이름의 식당을 하나 발견하고 나를 이끌었다. 식당이름은 보영이네였다. 풋. 의리있는 녀석이군. 자리를 잡자 아주머니는 접시와 수저를 나눠주셨다. 뷔페식이라 반찬도 마음껏 먹을 수 있었고 밥도 더 먹을 수 있었다. 첫 공기밥이 이미 고봉을 넘어 히말라야였으므로 깜짝 놀랐다. 그렇게 퍼주셨으면서도 아주머니는 먹고 더 먹으란다.
우린 돼지국밥을 시켰다. 국밥 맛은 나무랄데 없이 좋았지만 자랑할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국밥과 여러가지 나물반찬이 구비되어 있고 무한 리필이 가능하다는 점이 좋았고 이 모든 것의 가격이 오천 원이었다는 데 흡족했다. 난 고봉밥을 비우고 조금만 더 달라고 밥공기를 내밀었다. 이번에도 역시 아주머니는 밥공기에 밥을 꽉꽉 담아주셨다. 자전거를 많이 타서 배가 고파 많이 먹기도 했지만 더이상은 무리였다. 그렇다고 많이 먹으라고 퍼주신 밥을 남기기도 애매했다. 다행히 진우도 제 밥을 다 먹고 더 달라고 해서 내 밥을 덜어주었다. 그 모습을 보고 아주머니는 진우에게도 더 먹으라고 몇 번을 더 권했다. 그 말에 진우는 더 달라고 했지만 내가 이런 진우를 말렸다. 거기서 더 먹었다간 정말 큰일이라도 날 것만 같았다. 먹는 진우의 모습은 볼이 터질 것 같았고 배는 이미 만삭이었다. 간신히 먹자귀신이 붙은 진우를 달래고 값을 치룬 다음 길거리로 나왔다. 만족하는 듯 배를 쓰다듬으며 진우가 한 말은 이랬다.
아빠 여기 국밥 최고로 맛있어요. 내일도 여기서 먹어요
나 같으면 그렇게 먹은 직후엔 먹을 생각이 안들었을 텐데 진우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알았다고 하고 천천히 소화도 시킬 겸 시장을 둘러보기로 했다. 이미 시각이 많이 늦은 터라 시장 안 상점은 대부분 문을 닫은 상태였다. 하는 수 없이 우리는 숙소로 돌아왔다. 이렇게 경주여행의 1부가 끝이 났다. 이제부터 경주의 이곳저곳을 탐방하는 진짜 신라로 떠나기로 했다. 밤에 보는 환상적인 경주의 모습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