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보영 Jan 29. 2018

경주야경과 안압지 그리고 첨성대

부자여행:경주편#10

내가 학교 다닐 적에는 야경이라면 서울같은 대도시에나 가야 볼 수 있고 경주에서 볼 수 있는 불야성은 일 년에 한번 천변에서 열리는 야시장이 전부였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어릴 때 경주 관광지의 밤은 깜깜했다. 주요 관광지는 해질녁이면 문을 닫았고 야간개장은 생각하지도 못했었다. 그저 유흥가 부근에나 가야 밤을 잊은 듯 번쩍 거렸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인지 경주에 사시던 엄마가 경주는 야경이 멋있다면서 한 번씩 다녀가라고 했었다. 그래서 진우가 애기였을 때 우린 경주에 내려가 야경을 즐긴 적이 있다. 진우가 그걸 기억할 리 만무했다.


다시 자전거를 타고 경주역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밤은 어두웠지만 사람은 별로 없었고 가로등은 밝았다. 경주역에서 팔우정 로타리를 지나면 그때부터 유적지가 잔뜩 모여있는 지역이 펼쳐진다. 단층짜리 상가들도 눈 앞에서 사라져 평지가 나온다. 찰보리빵을 파는 마지막 상가의 유리에는 근처 유적지를 보기 좋게 표시해 두었다. 그 가게를 기준으로 첨성대 249미터 4분, 계림 434미터 7분, 천마총 414미터 7분, 교촌마을 734미터 12분, 월정교 809미터 13분, 반월성 석빙고 567미터 9분, 안압지 656미터 10분, 박물관 1.1킬로미터 16분, 분황사 1.1킬로미터 16분이라고 되어 있었다. 진우와 나는 안압지까지 갔다가 다시 되돌아오면서 월정교와 첨성대, 계림 그리고 마지막으로 천마총을 거치기로 했다. 걸어서 저정도 걸리므로 자전거로는 더 가까울 것이다. 다시 자전거에 올랐다.


너른 들판이 펼쳐진 오른편 저 멀리 첨성대를 비추는 조명이 첨성대를 아름답게 보여주고 있었다. 구름이 잔뜩 끼어 있어서 하늘은 더욱 까맣게 보였고 노란 조명을 받고 있는 첨성대는 신라금관 같았다. 만약 첨성대가 도심 한복판에 있었다면 빌딩들이 내뿜는 빛 때문에 첨성대의 야경은 초라해졌을 것이다. 이곳 경주에 있어서 더욱 빛을 발하는 느낌이었다.


안압지로 향하는 길 오른쪽에는 푸른 연꽃잎이 융단처럼 깔려 있었다. 진우와 나는 거기서 한참을 놀았다. 비록 연꽃은 피지 않았지만 우린 연인처럼 사진도 찍고 저 멀리 첨성대도 감상하면서 옛날 이야기도 했다. 아직 진우는 첨성대를 제대로 보진 않았지만 멀리서 본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안압지 입장료는 어른이 이천 원, 어린이는 육백 원이었다. 오전 아홉 시에 열어 밤 열 시에 닫으니 늦은 시간에 이곳을 찾은 우리에게도 관람시간은 넉넉했다. 그러고 보니 예전 경주에 살 때는 무료라서 몇 번은 엄마와 함께 다녀갔던 기억도 있다. 경주시민은 경주의 모든 유적지에 무료로 입장할 수 있는 제도 덕분이다. 그리고 이곳 안압지 입장료는 특이한 면제사유를 받고 있는데 잠깐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노약자 면제는 말할 것도 없고 공직자선거에 투표를 행사하고 투표확인증을 가져오는 사람은 면제되고 설날과 추석 연휴에 한복 착용자는 면제 받는다. 그리고 어린이날에 어린이는 무료다. 특이하기도 하지만 딱딱하다고 생각하기 쉬운 관공서의 정책치고는 위트 넘치는 면제제도다. 아쉽게도 우린 아무 것에도 해당되지 않았다.


입장권을 끊고 안압지 관내로 들어가자 너른 공터가 우리를 반겼다. 안압지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 축조한 왕궁의 후원으로 인공연못이다. 가운데 연못을 두고 사방으로 다섯 개의 건물지가 발굴되어 원래는 여러 가지 다양한 건축물들이 있었을텐데 지금은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안압지 발굴은 비교적 최근인 1974년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흔히 신라 천년의 고도라는 수식어로 경주를 꾸며준다. 가장 늦게 왕국을 이뤘지만 고대 삼국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국가를 유지한 신라는 강력했던 대제국인 당나라와도 어깨를 맞댈 정도로 멋진 힘과 문화를 가진 우리의 역사에서 가장 자랑스런 국가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뒤이은 국가들의 흥망성쇠가 거듭되고 급기야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신라 왕궁은 흔적만 남겨둔 채 사라진지 오래되었다. 그나마 안압지가 발굴 복원되면서 우리가 실물로 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장기간 이어진 왕국의 찬란했던 역사의 한 장면을 엿볼 수 있는 안압지는 야경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고 화려했다. 연못과 섬들은 사람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러웠고 주변의 풍광과도 잘 어울렸다. 옛 선조들의 낭만이 야심한 시각에 이곳을 찾은 우리에게 고스란히 전달되는 기분이었다. 천천히 연못 주위로 만들어진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밤중의 여유를 누리고 있는데 대나무 숲을 걸어 출구쪽으로 빠져 나가려는 순간 후두둑 제법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길거리 오뎅과 성동시장 돼지국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