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여행:경주편#13
아침을 배불리 먹은 후 우리는 숙소를 나왔다.
어제 비가 와서 그런지 날씨는 조금 스산했지만 추울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공기가 맑고 깨끗해져서 더 상쾌한 느낌이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경주의 아침이었다. 학창시절 새벽공기 가르며 자전거를 타고 학교를 가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 땐 참 춥기도 추웠었다.
진우와 난 경주역을 가로 질러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어제 오후 내내 자전거를 탔던 진우는 아쉬움이 남았는지 길거리에 서 있는 자전거에서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마침 2인용 자전거를 발견하고는 흥분하기도 했다. 저 멀리 불국사로 향하는 10번 버스가 달려오고 있었다. 허겁지겁 정류장으로 달려가 가까스로 버스에 뛰어 올랐다. 9시가 조금 모자란 시간이었는데도 불국사로 향하는 승객은 우리밖에 없었다. 넓은 좌석버스에서 진우는 진우대로 나는 나대로 적당한 자리를 잡고 앉아 차창 밖을 보았다. 경주역에서 불국사로 가는 길은 옛날과 크게 변하지 않았다. 내가 어릴 때 생긴 대형리조트와 호텔들도 큰 변화없이 그 자리에 있었고 보문호도 그대로였다. 어린 시절 소풍을 참 많이 오던 곳이었다.
버스는 한참을 달려 불국사 입구 아래에서 우리를 내려주었다. 버스에 내린 진우에게 관광안내소를 찾아보라고 했더니 냅다 뛰기 시작한다. 저만치 떨어져 있는 안내소를 발견한 것이었다. 아침부터 뛰기 싫고 카메라까지 메고 있어서 진우에게 뛰지 말라고 하면서 느긋하게 뒤따라 갔다. 진우가 안내지도를 고르는 사이 나는 직원분들에게 토함산에 올라가는 버스편을 물었다. 토함산 왕복 버스는 겨우 한 시간에 한 대만 다녔던 터라 불국사를 구경하고 내려와 토함산에 올라가면 예약해 둔 기차시간과 맞지 않아 어쩔 수 없이 토함산은 포기하기로 했다. 진우는 토함산에 무엇이 있는지 아는 지 모르는 지 토함산에 가지 못할 것 같다는 내 말에 서운함을 드러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까 한번 갔다 와요!”
나도 그러고 싶었지만 다음에 또 올 수 있는 여운을 남겨 두기로 했다. 진우와 여행을 다니며 생긴 새로운 프로젝트가 있다. 먼 훗날 진우와 단둘이 우리가 다녔던 여행을 다시 다니는 것이다. 우리가 갔던 전주의 게스트하우스, 우리가 먹었던 길거리 음식들, 함께 둘러 봤던 한옥마을, 오목대, 경기전 그리고 전주뿐만 아니라 춘천, 인천, 경주까지. 전부 갈 수는 없겠지만 지금 우리가 다녔던 여행지를 다시 가서 그 때 그 장소에서 찍었던 사진과 똑같은 사진을 찍는 것이다. 생각만 해도 짜릿하다. 그리고 행복감이 밀려온다. 토함산을 올라가지 못하더라도 괜찮을 것 같았다. 토함산을 가지 않는 대신 불국사를 여유있게 볼 수 있지 않는가.
경주의 대표적인 유적지인 불국사는 그 명성답게 입장료 또한 비쌌다. 경주시민이라면 무료라는 안내문이 내게 아쉬운 마음이 들게 했지만 어쩔 수 없다. 차라리 대한민국 국민 모두에게 무료로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입장권을 끊고 들어간 불국사 초입에는 이른 시간부터 찾아든 중국인 관광객들로 시끌벅적했다. 대개 단체관광으로 찾아든 이들이 우리나라 역사도시 경주를 찾아준 데에는 감사함을 느끼지만 같은 관광객의 입장에서는 그리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임에는 틀림없다. 시끄러운 건 둘째치고 다른 관광객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일이 많아서 그렇다. 이는 비단 우리나라만의 상황은 아니었다. 최근 일본에서는 벚꽃관광이 최고조로 달한 어느 지방에서 중국인 관광객들의 벚꽃나무 훼손을 지적하는 방송을 내보내기도 했다.
어쨌든 우리는 시끌시끌 무리지어 다니는 그들을 피해 다른 곳으로 서둘러 자리를 옮겼다. 다소 조용해진 다음에야 비로소 불국사의 아름다움이 눈에 들어왔다. 11월 중순의 경주는 한 차례 단풍이 휩쓸고 지난 끝물이었지만 그 여운은 진하게 남아있었다. 어제 내린 비로 우수수 떨어져 있는 단풍잎은 바닥을 화려한 색채의 비단으로 덮어둔 것처럼 예뻤다. 하늘의 단풍잎과 바닥의 단풍잎이 조화를 이뤄 그 가운데 서 있는 진우가 더 도드라져 보였다. 단풍도 진우도 예뻤다.
천왕문의 사천왕상을 지나쳐 본격적으로 불국사 경내에 들어섰다. 너른 공터와 단풍나무들이 편안하게 느껴졌다. 진우 손을 꼭 잡고 천천히 걸었다. 어때. 여기가 불국사야. 불교의 나라 신라시대에 지어진 절인데 벌써 천오백 년도 더 된 절이야. 엄청 오래됬지? 옛날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멋진 건물을 지었는지 아빠는 참 궁금해. 지금처럼 과학이 발전하지도 않았고 거중기 같은 장비도 나중에야 발명됐는데 말이야. 신기하지? 진우에게 해주고 싶은 얘기가 넘쳐났다. 하지만 내 얘기를 가만히 듣고 이해해 줄 진우가 아니었다. 어느 순간 내 손을 놓고 뛰기 시작했다.
“아빠! 저기 봐요! 물이 나와요!”
약수터를 발견한 것이다. 백운교 옆에 자리한 약수터는 산 속에서 만난 오아시스같았다. 우리보다 먼저 일단의 무리들이 지나쳐 갔는지 약수터의 물그릇은 어지러이 놓여있었다. 그나마 한 개만 물그릇 걸이에 걸려 있었다. 진우에게 물그릇 하나를 씻어 물을 담아 주었다. 산 속에서 나오는 천연의 물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물을 약처럼 좋은 물이라는 뜻으로 약수라고 한다고 알려 주었다. 자기 몸 챙기기를 최우선시하는 최진우 군은 약수를 세 번이나 벌컥벌컥 마셨다. 약을 먹어서 그런건지 물을 먹어서 그런건지 진우는 다시 팔팔해졌다. 씩씩하게 나를 앞서갔다. 가끔씩 내가 진우를 불러 사진을 찍어주는 거 외에는 우린 별말 없이 천천히 걸었다.
대웅전에 오르자 꽤 많은 사람들이 구경하고 있었다. 다보탑은 그 세밀하고 정교한 모습에 감탄이 나온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석가탑은 해체보수가 진행되고 있어서 볼 수 없었다. 공사시간종료가 불과 한 달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한 달 뒤에 왔더라면 다보탑과 석가탑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느낄 수도 있었을텐데 아쉬웠다. 대개 사람들은 석가탑보다는 다보탑을 더 좋아한다. 다보탑은 10원짜리 동전에 들어갈 정도로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다보탑도 좋아하지만 석가탑을 더 좋아한다. 다보탑이 정교하고 기교 섞인 아름다움이 있다면 석가탑은 선의 아름다움이 있는 탑이다.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 보는 석가탑의 선들은 자연스러움과 편안함을 주는 듯해서 나는 석가탑을 더 좋아한다. 그런데 석가탑 실물을 보지 못하다니. 그래도 이렇게 다보탑의 실물이라도 가까이 보니 좋았다.
대웅전을 거쳐 극락전, 무설전을 천천히 둘러 보고 불국사를 빠져나왔다. 시간은 벌써 한참 지나 있었다. 봄의 대왕벚꽃이 불국사를 밝고 환하게 치장해 준다면 가을의 단풍은 불국사를 고귀하고 위엄있는 품격으로 탈바꿈해 준다. 그리고 한겨울 눈 내린 불국사의 풍경 또한 장관임에 틀림없다. 여름의 불국사 또한 매력이 클 것이다. 모든 계절의 불국사를 천천히 느껴보고 싶은 충동도 생겼다. 파주에서 멀지만 않다면 자주 오고 싶지만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