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여행:경주편#마지막 편
두 시간 넘게 불국사를 걸었다.
아무래도 아침이 좀 부실했는지 점심 때는 한참이나 남았는데 배가 고팠다. 불국사를 나오니 조그만 리어카에 번데기를 파는 아저씨를 만날 수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먹거리를 아들도 좋아하면 난 별로 먹지 못하는 일이 벌어진다. 번데기도 마찬가지였다. 관광지 물가답게 비싼 값을 치루고 종이컵 가득 담은 번데기를 진우 손에 쥐어주었다. 난 두 번 먹고 전부 진우 차지였다. 진우도 배가 고프다고 했다.
올 때 탔던 버스를 타고 다시 내려갔다. 시내는 다소 활기를 띤 것처럼 교통량이 많아졌다. 팔우정 로타리에 내려 해장국거리로 방향을 잡았다. 그러고보면 경주는 정말 먹을거리가 없다. 요즘은 먹거리가 지천에 널리고 한 집 건너 두 집이 맛집이고 지방마다 특출한 음식이 있기 마련인데 경주는 유독 내세울 만한 게 없었다. 어딜 가도 만날 수 있는 해장국집들이 많아 그나마 해장국거리가 형성되어 있을 뿐이었다. 이곳도 사실 맛집이라기 보다 밤새 술 마시고 다음날 해장하러 가는 그저그런 식당들이었다. 내 기억엔 그랬다.
배도 고프고 맛집도 찾을 필요가 없어서 그냥 눈에 보이는 해장국집에 들어갔다. 메뉴에는 콩나물해장국, 추어탕, 선지해장국이 있었는데 진우가 못 먹어본 선지해장국을 시켰다. 선지가 뭐냐는 질문에 그냥 먹어보면 알거라고 둘러댔다. 미리 얘기했다가 선입견 때문에 안먹을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오래지 않아 해장국이 우리 앞에 놓여졌다.지름 오십 센티미터 정도되는 쟁반에 공기밥, 선지국, 깍두기, 젖갈, 양파절임, 나물, 멸치볶음이 담겨진 일인분용이었다. 선지국에는 초콜릿색 선지가 두부처럼 네모나게 잘려 담겨 있었고 시래기와 대파가 적갈색 국물에 담겨 있었다. 진우의 호기심을 충분히 자극할 만한 모양새였다. 그게 뭐냐고 다시 물었지만 일단 먹어보라고 권했다. 진우는 선지 귀퉁이를 숟가락으로 잘라 한 입 크게 넣고 오물오물 먹었다. 먹을 만하냐는 내 질문에 맛있다를 연발했다. 도대체 너한테 맛없는 건 뭐냐. 진우는 정말 잘 먹었다. 점심 시간이 되려면 아직 멀었기 때문에 한 그릇만 시켜 나눠 먹었는데 밥이 모자라 조금 더 달라고 했더니 친절하게 조금 더 주셔서 둘이서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선지해장국 맛은 정말 최고였다. 경주에 이렇게 맛있는 해장국이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춘천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국물까지 남김없이 비우고 나서야 일어났다. 주인 아주머니는 우리에게 여행 중이냐고 물었고 이번엔 진우가 나서서 대답했다. 어른들과의 대화도 서슴없이 나눌 수 있는 진우가 되었다.
두 번째 아침을 넉넉하게 먹고 우린 다시 걸었다. 집으로 가는 ktx는 경주역이 아니라 신경주역에서 타야 했기 때문에 다시 버스를 타기 위해 경주역으로 향했다. 경주역 앞에는 경주로 오는 관광객들인지 경주를 떠나는 사람들인지 모를 무리가 단풍색 곱게 물든 아웃도어 옷들을 입고 있었다. 이른 시간 질서정연하게 줄을 지어 있는 오륙 십대 아저씨 아주머니들이 삼삼오오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어디서 왔든 어디로 가든 기분 좋은 얼굴들이었다. 경주역을 지날 때 진우는 경주역 앞에 전시되어 있는 기차 모형에 뛰어 올라 한참을 놀았다. 나도 사진을 찍으며 잠시 쉬었다.
신경주역은 경주에서도 다소 떨어진 곳에 있다. 내가 살 때는 없었던 역이었는데 ktx가 생기면서 새로 만들어진 역이다. 역 구내에는 그리 많지 않은 사람들이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고 진우와 나도 역 내에 있는 기념품 가게에서 엄마와 연우를 위한 기념품을 골랐다. 이번에는 경주찰빵을 골랐다. 우리도 먹어보지 못한 기념품을 같이 먹을 요량으로 고른 것이다. 경주찰빵은 보리빵이었는데 언제 이런 걸 경주라는 브랜드로 팔았는지 모를 정도로 낯설었다. 경주엔 황남빵이 유명한데 요즘은 홍보의 효과인지 황남빵보다는 경주빵이 더욱 인기였고 경주찰빵도 제법 팔리는 모양이었다. 경주찰빵을 한 상자 구입하자 가게점원이 맛보라며 두 개씩 더 주셔서 진우와 나는 맛을 보았다. 좀 싱거운 맛이었지만 황남빵보다는 많이 달지 않아서 괜찮았다. 군것질 좋아하지 않는 진우는 “별로”라는 짤막한 시식평을 남겼다.
한 시에 출발하는 고속열차는 제 시간에 우리를 태우고 달리기 시작했다. 원래 오고가는 교통편은 모두 고속버스로 하려고 했는데 다섯 시간에 육박하는 이동거리에 좁은 공간은 아이에게 견디기 힘든 고통의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아내에게 ktx표를 예매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원래 예상했던 교통비보다 두 배 넘게 지출했지만 넓고 빠르고 버스보다 쾌적한 열차를 이용해서 진우는 좋아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사진들을 보면서 어제와 오늘 아침을 돌아보았다. 참 많은 사진을 찍었고 많은 곳을 다녔다. 아빠가 어릴 때 살던 곳, 아빠가 다녔던 학교, 아빠가 놀았던 놀이터, 아빠가 공부했던 도서관, 아빠가 자전거를 타고 다녔던 길을 아들과 함께 다니면서 정말 뿌듯했고 행복했다. 진우는 어떻게 느꼈는지 모르겠지만 갈수록 진우는 여행을 좋아하는 눈치였다. 여행을 마무리하는 이 길에서 나는 또다시 진우와 함께하는 여행을 꿈꾸었다. 다음엔 어떤 추억이 우릴 기다리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