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여행:제주편#04
비싼 비행기든 값싼 비행기든 김포에서 출발한 비행기는 한 시간도 채 안 걸려 우리를 제주공항에 내려준다.
저가항공은 의자가 좁아서 불편하고 기내 서비스가 좋지 않다는 단점이 있다. 하지만 아이는 의자를 좁다고 느낄 만큼 덩치가 크지 않았고 나도 그 정도 불편함은 기분 좋게 감수할 정도로 아직 젊다. 비행기는 50여 분간 우리나라 상공을 가로질러 우리를 제주에 안전하게 내려주었다. 낯설지 않은 제주공항에 도착하였다. 출구 밖 야자수가 서울과 다른 이국적인 인상을 주었다. 진우에게 야자수를 가리키며 알려줬다.
“진우야 저게 뭔지 알아? 나무 말이야”
“네. 야자나무잖아요.”
이미 알고 있다고 별일 아닌 듯이 대답한다. 김빠진 나는 아이 손을 잡고 서둘러 렌트카하우스에서 자동차를 인수받고 첫 번째로 국수집으로 향했다. 이 국수집은 제주에 오면 매번 들르는 곳이다. 아마 많은 제주여행자가 이곳을 제일 먼저 들른다고 어느 광고를 본 적이 있을 정도로 이 집은 유명하다. 달라진 점이라면 국수 가격의 맨 앞자리 숫자가 지난 번 여행 때보다 커졌다는 것이다. 그래도 이곳 국수가 이 맛을 이어간다면 당분간은 계속 올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만큼 진우도 좋아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첫 번째 식사로 이곳을 정했다.
국수는 진우가 좋아하는 메뉴기도 했다. 10여 분 거리의 그 식당 앞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있었다. 역시 예전과 같은 명성임을 느꼈다. 그런데 진우는 줄이 길게 늘어서 있는 모습을 보고는 다른 곳에 가자고 조른다. 근처 다른 식당은 대부분 한산했고 다른 가게에서도 우리가 먹으려고 하는 고기국수를 팔고 있다는 아주 합리적인 이유를 대면서 말이다.
진우와 내가 여행하면서 세운 원칙 아닌 원칙 중에 하나가 바로 현지 음식을 먹어보는 것이다. 현지 음식이라는 게 비싸고 귀한 음식을 얘기하는 건 아니고 보통 현지인들이 간단하게 먹는 식사류를 말한다. 그래서 지금까지 우리는 여행 중에 늘 여행지 한가운데 있는 시장에 들렀고 그곳에서 시장사람들과 함께 국밥을 먹은 것이다. 그것처럼 제주에 왔으니 고기국수는 먹어봐야 한다고 미리 얘기해 뒀기 때문에 이곳에 온 것임을 진우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아빠는 이상하게 다른 식당은 놔두고 하필 사람들이 제일 많은 식당만 고집한다. 배가 고픈데 말이다.
나는 진우에게 그 식당이 고기국수집에서는 가장 맛있는 집이라고 설명해줬다. 그런데도 진우는 국수가 다 거기서 거기지 뭐가 특별하게 맛있냐며 아무 집에나 가자고 졸라댔다. 한참을 설명했는데도 막무가내로 나올 때는 어쩔 수 없이 나도 막무가내로 할 수밖에 없다. 감성에 호소하는 수밖에.
“진우야 아빠가 먹어봤더니 여기가 제일 맛있었어. 배고프지만 조금만 참아봐. 할 수 있지?”
나도 조금 허기를 느낄 정도였으니 아마 진우는 배가 많이 고팠을 것이다. 다행히 진우는 아빠말처럼 참기로 했는지 이곳저곳을 기웃기웃하며 시간을 때운다. 손님이 많았지만 그래도 줄은 금방 줄었고 우린 2인용 테이블에 앉을 수 있었다. 원래는 국수를 한 그릇만 주문해서 나눠 먹으려고 했는데 배가 고팠고 손님 많은 식당에서 자리차지하는 게 면구스러워 그냥 두 그릇을 주문했다. 국수 양은 변함없이 많았다. 어른인 나도 다 먹고 나면 배가 부를 정도였다. 진우가 다 먹을 수 있을까 살짝 걱정도 되었다.
고기국수는 돼지고기를 넣고 푹 끓인 돼지육수에 중면을 삶아 넣은 것이다. 국수 면발의 쫄깃함도 일품이지만 큼직큼직하게 썰어넣은 고기가 정말 부드러워서 왠만한 수육보다 훨씬 맛있다. 함께 나오는 반찬은 김치와 풋고추 그리고 쌈장으로 단출한 편이지만 고기국수와는 최고의 궁합을 자랑한다. 보통 국수를 먹을 때 고기를 면이랑 같이 먹는데 진우는 보쌈을 먹던 기억이 떠올랐는지 고기를 따로 꺼내 김치에 싸서 큼지막하게 입에 넣고 오물오물 맛있게도 먹었다.
“진우야 그렇게 먹으니까 어때? 맛있어?”
“네! 아빠도 드셔보세요!”
나도 진우를 따라서 그렇게 먹었다. 그냥 먹었을 때보다도 훨씬 더 맛있었다. 적지 않은 김치였는데 한 그릇 다 먹고 또 한 그릇 시켜서 먹었다. 그 많던 면도 금방 없어져 버렸다. 진우가 알려준 방식대로 먹어도 맛있고 어떻게 먹어도 맛있었다. 기다린 보람이 있지 않냐는 내 말에 면발을 입밖으로 길게 폭포처럼 물고 있는 진우가 고개만 끄덕였다. 많은 국수였는데 금방 줄어들었다. 돼지뼈와 고기로 낸 국물은 멸치육수나 소고기육수와 달리 고소하고 기름져서 호불호가 갈리는 데 난 이 국물을 정말 좋아한다. 일본 라멘도 이런 방식으로 육수를 내서 생면을 담아주기 때문에 일본 라멘도 역시 좋아한다. 아니 고백하자면 나는 먹는 걸 대부분 좋아한다. 그리고 또 잘 먹는다. 뜬금없지만 이렇게 나를 나아주신 어머니께 감사드린다.
우리 뒤에도 사람들이 계속 줄지어 서 있었기 때문에 뒷사람을 위해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역시 기다려 먹기를 잘했다. 우린 배불리 먹고 식당을 나섰다. 그 때 시간이 다섯시였다. 간식으로 먹으려던 국수가 저녁식사가 되어 버렸다. 너무 배가 불러 뭘 더 먹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해가 뉘엿뉘엿 떨어져 땅거미가 내려오고 있었다. 우선 예약해 둔 게스트하우로 가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