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여행:제주편#08
하긴 진우의 주체할 수 없는 에너지를 발산시키기엔 게스트하우스는 너무 좁았다.
추워 보이긴 해도 자전거를 좀 타면 괜찮아지리라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나갈 채비를 했다. 어찌 보면 제주여행이 진짜 시작되는 순간인데 흥분한 진우와 달리 난 조금 지쳐있었던 모양이다. 혼자였다면 늘어져 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우리의 첫 코스는 ‘관곶’으로 정했다. 처음 들어본 관곶은 바다쪽으로 툭 튀어나와 있는 곶인데 여느 곶과 달리 타원형 모양의 제주도에서 육지인 해남과 가장 가까운 곳이라고 한다. 직선 거리로 83Km 떨어져 있다고는 하지만 그게 얼마나 가까운 거리인지 이곳에서는 실감나지 않는다. 우리가 자전거를 탄다고 하니 호스트는 우리에게 게스트하우스를 기준으로 전환점이 될 만한 곳을 알려 주었는데 그곳 중 한 곳이 바로 관곶이었다.
관곶으로 가는 대강의 설명을 들은 뒤 진우와 나는 자전거에 올랐다. 스마트폰 지도로 대강의 위치를 확인하고 어떤 도로를 이용하는 것이 좋을지 판단했다. 거리상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바람이 조금 강하게 부는 것을 제외하고는 날씨도 나쁘지 않았다. 방향을 잡고 천천히 자전거를 몰았다. 게스트하우스가 위치한 북촌은 흔한 관광지 하나 없는 조그만 마을이었다. 그 점이 마음에 들어 정한 숙소였는데 좋은 호스트를 만나 자전거 여행이 가능해진 것이다.
마을은 서른 개 정도의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마을 입구에는 초등학교도 있는데 도로를 건너면 또 큰 마을이 나오는 모양이었다. 관곶으로 가는 길은 넓은 2차선 도로의 가장자리에 자전거도로가 잘 만들어져 있어서 크게 위험하지 않았다. 길은 가끔 렌트카들만 오고갈 뿐 대체로 한적했다. 해안 가까운 이 도로는 주변에 건물들도 많지 않아서 제주의 풍경을 느끼기에 좋았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진우와 자전거를 타면서 둘이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각자 자신의 자전거 위에서 제주를 보고, 제주의 냄새를 맡고, 제주의 소리를 들으며, 온몸으로 제주를 느끼고 있었다. 그동안 가족여행으로 이곳을 찾았을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제주가 다가왔다. 뭐랄까 눈에 보이지 않던 제주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동안 제주는 육지보다는 오기 어려운 곳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한 번 올 때마다 최대한 많은 곳을 일정에 집어 넣었고 빨리빨리 혹은 대충대충 보고서는 이동이동했다. 가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꼈는가 보다는 집으로 돌아갔을 때 이번에 이러이러한 곳 몇 군데를 다녀왔다는 인증이 중요했었다. 하지만 사실 그런건 중요하지 않았는데도 경쟁적으로 관광지를 돌아다니기만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번 여행은 달랐다. 여행의 목적도 달랐지만 여행에 임하는 마음도 달랐다. 그래서 그런지 제주가 달라보였다. 제주는 원래 거기 그대로 있었겠지만 내가 달라진 것이다. 진우 덕분에 큰 깨달음을 얻은 기분이었다.
해안도로와 올레길을 번갈아 타면서 최대한 바다 가까운 노선으로 자전거를 몰았다. 저 멀리 방파제 위에 두 명의 강태공이 눈에 띄었다. 진우는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가보자고 했다. 도로변에 자전거를 세우고 털레털레 낚시꾼들 옆으로 다가갔다. 잘 뭉개놓은 떡밥과 두부처럼 각져있는 냉동새우가 그들 옆에 놓여 있었고 어망 대신 아이스박스가 있었다. 아이스박스는 비어 있었다. 그리 오랜 시간 낚시를 한 모양새는 아니었다. 부지런히 떡밥을 던지고 물고기를 몰고 있었다. 두 낚시꾼은 우리의 등장을 개의치 않으며 자신들의 낚싯대에 집중했다. 아무런 말도 없었고 나도 그들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우린 그저 조용히 그 옆에 앉아 낚시를 구경했다. 낚싯대에 미끼를 꼈다가 물에 담갔다가 또 꺼내서 미끼를 꼈다가 다시 물에 담갔다가를 반복했다. 단순하고 단조로운 모습이었는데 진우는 지겨워하기는 커녕 자기도 해보고 싶다고 중얼거렸다. 난 개인적으로 낚시를 싫어하지 않지만 진우가 낚시를 하는 것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물론 본격적인 물놀이보다는 덜 위험하겠지만 아직까지는 물 근처에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는 얼마 전 이사를 했는데 우리집 앞이 바로 인공낚시터였다. 진우와 연우는 하루에 한 번정도 낚시터에 놀러갔다 왔다. 가지 말라는데도 기어코 다녀왔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꼭 낚시를 해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가 이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낚시터는 ‘폐장’이라는 문구를 남기고 더이상 손님을 받지 않았다. 결국 얼마 후 물을 빼고 흙을 메우더니 전원주택을 분양한다고 환골탈태했다.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나중에 아빠가 꼭 낚시를 가르쳐 주겠다는 약속만 굳게 했을 뿐이다. 하염없는 낚시 구경은 출발하자는 내 제안으로 끝이 났다. 낚시꾼들이야 잡히길 바라겠지만 내가 봤을 땐 쉽사리 올라올 것 같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 이곳을 지나쳤을 때 그들은 그곳에 없었다. 어쨌든 내 판단은 옳았다.
제주의 바람은 유명하다. 제주는 바람과 물 그리고 여자가 많은 삼다도라고도 한다. 오늘 바람은 특히 많았다. 바람이 등에서 불어오면 자전거 타기가 수월했지만 앞에서 불어오면 얼굴도 제대로 못들 정도로 힘이 든다. 헬멧 구멍 사이로 머리카락이 삐죽삐죽 튀어나온 채로 바람을 맞으면서 달리는 진우 모습이 재미있다. 자전거를 타면서 커다란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 일이 쉽지만은 않지만 추억을 많이 남기기 위해서라도 힘들지만 많은 사진을 찍었다.
한참을 달려 우리는 관곶에 도착했다. 관광지라고 하기에 민망할 정도로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관곶임을 알리는 표지판과 조그만 단층짜리 건물이 덩그러니 있었다. 그래도 이 상가는 문어라면으로 꽤 유명한 모양이었다. 문어도 좋아하고 라면도 좋아하지만 아침을 먹은지 얼마되지 않아서 먹어보지 못했다. 그냥 진우와 둘이서 모처럼 기념 사진을 찍고 관곶 일대를 한 바퀴 도는 것으로 관곶 방문을 마쳤다. 바다로 튀어나와 있는 관곶의 바람은 더욱 거세게 느껴졌다. 다행이 오후로 접어들면서 해가 나고 따뜻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