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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톺아보기 Sep 20. 2023

김치를 담갔다 - 삶의 리듬에 대하여

아이를 키우면서 일을 했던 나는 늘 시간을 쪼개서 살아야 했다.

일만이 아니다. 내 하고 싶은 걸 하기 위해 도서관을 가고 책을 보고 지금에서 되돌아 그것이 무슨 성과를 낳았느냐고 하면 모래알처럼 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버린 무위와도 같은 그것들을 위해 시간을 더 나누어 썼다. 

되돌아보면 그랬다. 


해야 할 것과 내가 하고 싶은 일들 사이에 균형을 맞추기에 시간은 넉넉하지 않았다. 

그 넉넉하지 않은 시간 속에서 그래서 늘 나는 조급했다. 

무언가 열심히 빨리 해야 할 것이 있다고 나를 독려하고 재촉하며 삶의 공허함을 채워왔다. 


제법 나이가 들어서는 쉽게 풀리지 않는, 아니 더 나빠져가는 가정 형편이 나를 다그쳤다. 

주경야독처럼, 낮에도 일하고, 밤에도 일하고 그 짬짬이 내가 좋아하는 것들도 하고.

입으로는 나이를 먹었다 한탄했지만 여전히 내가 짊어질 과제들이 나의 시간들을 채우며 늙는 것조차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도록 하였다. 


아이를 키우면서 우스개로 엄마의 음식은 '반스턴트'라고 자평했었다. 

완전 인스턴트는 아니지만 빠른 시간 안에 식구들이 먹을 밥상을 마련하기 위해 

적당한 선의 편의와 적당한 선의 엄마 손맛을 섞은 요리들을 해내며 오늘의 밥상을 방기 하지 않을 수 있음을 자부했다. 내가 즐겨하는 여름철 한 끼 중에 '백 선생'에게 배운 두부로 만든 콩국수 같은 게 그 대표적인 스타일이라 할 수 있겠다. 김장을 하다 어느덧 맛깔난 김치를 적당히 사 먹고, 또 계절 김치를 적당히 해 먹는 게 내 나름의 묘수였달까. 


그리고 이제, 

그 다그치며 살아왔던 삶의 리듬이 나를 들볶는다. 

여전히 의미 있는 그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하고 싶지만,

어느덧 나는 딱히 열심히 해야 할 그 무엇을 가지지 않는 나이가 되었다. 

누군가에게 말했듯이 그 누구도 나에게 이것을 해야 한다고 하는 그 무엇이 없는 나이가 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분발하며 살아왔던 시간의 리듬에 쫓기는 그 템포에서 쉬이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고 그것은 아침에 눈을 뜨면 두근거림과 초조함으로 나의 하루를 열곤 한다. 


그래서 하루의 과제가 달라져간다. 

오늘 하루 내 요동치는 마음을 잘 다스리며 살기. 딱히 할 것 없는 이 삶의 느긋한 리듬에 적응하기. 

지난 사회적 거리 두기 시간 동안 몇 시간씩을 걸으며 흘려보냈던 마음이 도달한 과제이다. 

마음이 바빠 들을 수 없었던 라디오의 클래식으로 하루를 연다. 그 속에서 전해지는 각자의 사연들에 귀를 기울이고자 한다. 나의 템포 속에 달려오느라 살펴보지 못한 것들에 귀 기울이고 눈여겨보려고 한다. 

그리고 나를 달랜다. 천천히, 천천히, 천천히 지내보자고. 


요즘 읽고 있는 줄리언 반스의 <아주 사적인 미술 산책>에 나온 한 문구가 나를 다독였다. 50세가 넘어 첫 전시회를 연 화가 세잔, 그에 대해 줄리언 반스는 말한다. 많은 천재 화가들이 젊어 생을 마친다. 때로는 자의로 생을 마감하기도 한다. 하지만 살아남는 것은 그 자체로 위대하다고. 살아남는다는 것은 끊임없이 일을 한다는 것이고. 스스로 분발하는 것이기에. 


그렇다. 살아가야 한다는 건, 끊임없이 우주에서 티끌만도 못한 자기 자신의 실존에 대해 존재의 족적을 남기기 위한 전투의 과정일지도 모른다. 차오르는 허무, 되돌아보면 아무것도 아닌 시간, 그리고 다가올 무료함. 이런 것들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주어진 시간에 지지 않기 위해, 나에게 주어진 이 삶을 허투루 보내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분발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김치를 담갔다. 사 먹던 배추김치 대신에, 배추를 사고, 절구어 모처럼 메이드 바이 엄마 김치를 담갔다. 남편이 싸다고 사들고 온 오이로 그 손 많이 가서 매번 기피했던 오이소박이도 담갔다. 한 입에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르다 보니 한 양푼이 되어버리게 양이 늘어난 오이소박이의 속을 넣으며 내 머릿속을 자꾸만 채워가는 상념을 달래며 어릴 적 잠 안 드는 아이를 재우며 아파트 광장을 두 시간 돌며 불렀던 동요를 불렀다. 이럴 때 좀 아는 노래가 많았으면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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