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삽니다

by 이십삼

동쪽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언제나 비릿하고 짠 내음을 머금고 있었다. 그러나 그 해 봄부터, 바람은 이전과 다른 것을 실어 나르기 시작했다. 섬의 가장자리에 다닥다닥 붙어 앉은 작은 마을, 오조리 사람들에게는 기이한 공통점이 생겼다. 그들은 모두, 같은 내용의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이다. 젊은 총각부터, 늙은 해녀까지, 잠든 이들은 모두 같은 장면 속에서 같은 공포를 겪었다. 처음엔 각자 헛것을 봤다 여기며 다음 날 서로의 의미심장한 눈빛을 모른 척했다. 하지만 점차, 모두의 눈빛 속에서 기시감이 번져가는 것을 외면할 수 없게 되었다. 묵묵히 제 삶을 살아가던 마을 사람들은 누군가의 비극적인 꿈을 매일 밤 강제로 '사게' 된 것이다.


깊은 밤, 잠결에 떠오른 그 꿈은 비통하고도 아득하여, 아침이 되어도 쉬이 가시지 않는 눅진한 그림자처럼 그들 위에 드리워졌다. 꿈속에서 사람들은 끝없이 이어지는 현무암 돌담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길의 끝에는 노오란 유채꽃이 만발한 언덕이 있었지만, 달빛인지 불빛인지 모를 붉고 기이한 빛이 온 섬을 삼킬 듯 번져가며 유채꽃들은 서서히 핏빛으로 물들어 갔다. 발밑의 흙은 차갑고 축축했으며, 이따금씩 현무암 틈새로 섬뜩한 웅덩이가 고였다. 거기서는 쇠비린내가 났던 것도 같고, 잿내가 풍겼던 것도 같았다. 그 웅덩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더 이상 자신이 아니었다. 낯선 이의 공포에 질린 눈빛이 서려 있었고, 찢어질 듯한 비명에 고막은 뚫릴 듯 했다. 돌담길 너머에서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바람결에 실려오다 갑자기 끊어졌고, 그 자리에는 새까만 침묵만이 남아 사람들의 목젖을 죄었다. 그들은 앞만 보고 달렸으나, 달릴수록 지척에 선 누군가의 옆얼굴이 무너져 흘러 내리는 것을 보았다. 거리엔 부패한 시신과 잘려나간 손가락, 그리고 흘러내린 내장이 있었고, 깊게 밴 시체 썩은 내가 모두의 발걸음을 굳게 했다. 얼어붙은 시간 속에서 그들은 공포에 질린 채 서로를 응시하다가, 산산이 부서지는 파도처럼 사라졌다. 꿈의 절정에서 모두는 온몸을 꿰뚫는 듯한 한기와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꿈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매일 밤 같은 장면이 반복되었다. 이제 그것은 잠결의 허상이 아니라, 오조리 사람들의 하루를 지배하는 또 하나의 현실이 되어버렸다. 해가 뜨면 눈을 뜨지만, 사실 그들은 여전히 어젯밤의 꿈속에 살고 있었다. 밭을 매고, 오징어를 잡고, 빨래를 널면서도 그들의 시선은 먼 곳을 응시했고, 그 먼 곳에는 어젯밤 피로 물든 유채꽃밭을 달리는 그들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갓 지은 밥 냄새 대신 알 듯한 슬픔이 피어올랐고, 고요해야 할 텃밭에서는 농부들이 호미를 든 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곤 했다. 늙은 해녀는 물질을 하러 바닷속 깊이 잠수했다가, 차가운 현무암에 부딪히는 그 날의 총성을 듣고는 몸서리를 치며 수면 위로 솟구쳐 올랐다. 가끔, 멀리 오름 자락에서 연기 같은 안개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면, 마을 사람들은 고개를 돌려 마치 기억하기 싫은 무덤이라도 보듯 멍하니 응시하곤 했다.


마을 어귀, 오래전 흔적만 남은 허물어진 담장 아래, 유난히 끈질기게 노오란 유채꽃이 피어나 바람에 흔들렸다. 그 꽃들은 마치 잊힌 기억을 조용히 속삭이는 듯했고, 꽃잎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은 말하지 못한 이야기를 품고 있는 듯했다. 오조리 사람들의 텅 빈 눈동자 속에는 알 수 없는, 하지만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는 서늘한 불안감이 서려 있었다. 과거 이 마을은 아무도 꿈을 꿀 수 없었다. 오늘날 그들이 꾸는 꿈은 이미 팔려나간 남의 꿈이자, 동시에 모든 이가 공유하는 비극적인 과거였다. 그들은 자의로든 타의로든, 이 거대한 꿈 속에서 영원토록 '살고' 있었다. 얇은 잠옷 차림으로 멀리 검푸른 바다를 응시하는 시어머님의 눈가에서, 이른 새벽부터 오징어 배를 띄우는 삼촌의 옆얼굴에서, 이유 없이 허공을 향해 손을 뻗는 아이의 작은 몸짓에서, 그 꿈이 얼마나 생생하게 모두를 붙들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꿈은 말이 없었으나, 살아남은 자들의 마음속에 오래된 상흔처럼 깊게 새겨졌다. 그것은 그저 잊힌 과거의 단편이 아니었다. 오랜 세월 침묵 속에 묻혀 있던 그날의 비극이, 바닷물처럼 짜고 피처럼 붉게, 꿈이라는 형태로 다시 흘러들어 온 것 같았다. 그들의 잠결에 스며든 피 묻은 기억들은, 살아있는 이들의 온몸을 시린 슬픔으로 감싸 안았다. 차마 소리 내어 울지 못하는 영혼들의 비명은 그렇게 꿈속에서, 그리고 아침의 고요 속에서, 마을을 잠식해갔다.


그들은 살아있으면서도 꿈에 삽니다. 그 잔혹한 기억 속에서, 그들은 오늘도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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